'촌놈'이라고 무시 이 악물고 공부로 승부

"젊은이들, 실패 두려워 말고 집념갖고 도전"

[한국의 CEO 나의청춘 나의 삶] (29) 신훈 금호아시아나 건설부문 부회장
'국내 도급순위 1위 건설업체인 대우건설 인수를 진두지휘한 승부사', 'IT 지식으로 무장한 디지털 CEO'.

신훈 금호아시아나 건설부문 부회장(62)에게 꼬리표처럼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신 부회장과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의 화려한 이력만 보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미리 단정짓기 쉽지만 실제 그의 모습은 구수한 '된장찌개'에 가깝다.

오히려 연 매출 7조원을 넘는 금호건설과 대우건설을 '쌍끌이'하는 수장치고는 너무 소박한 모습에 당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이 같은 여유로움이 치열한 도전과 집념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어렵게 얻어낸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신 부회장이 태어난 곳은 전남 장흥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마치고 5학년 새학기에 광주로 유학을 나왔다.

'깡촌'에서 전학 온 까까머리 소년에 대한 도시 친구들의 텃세와 차별이 심했다.

"성적순으로 1~6분단으로 나누는데 시골에서 왔다고 성적도 안 보고 6분단에 앉히더라고요.

얼마나 화가 나고 분하던지 공부로 친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채 한 달이 안돼 1분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뒤로는 1등을 뺏겨본 적이 없어요.

졸업할 때는 전교 대표로 졸업장도 받았으니까요."

명문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향후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수학'에 큰 흥미를 갖게 된다.

"고1 때 수학 선생님이 굉장히 무서웠는데 어느 날은 어려운 문제 하나를 칠판에 써놓고 번호대로 한 사람씩 나와서 풀게 했어요.

내 번호 앞까지 아무도 못 풀더군요.

2차함수 근의 공식을 내는 증명이었는데 내가 수업종 칠 때까지 45분간 풀었어요.

선생님도 놀라더군요.

인정을 받으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됐어요.

그 수학 선생님 때문에 수학에 더 빠져들게 됐지요."

고3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준비했지만 등록금 마련이 큰 문제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4남1녀 중 넷째인 그가 학비를 달라고 집에 손을 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청 말단 공무원이었던 신 부회장의 아버지는 의대에 진학한 큰형님 학비를 대기도 빠듯한 상황이었다.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간다고 생각하니 참 답답하더군요.

근데 고3 졸업 무렵에 경희대에서 전국 고교학력경시대회를 열더라고요.

학교 대표로 나가서 수학 부문 전국 1등을 했어요.

1등한테 원하는 학과에 4년간 무료 장학금 혜택을 준다기에 경영학과에 들어갔어요.

절실히 원하면 뭐든지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근데 적성이 안 맞아서 1년 뒤에 서울대 사범대 수학과에 다시 들어갔어요.

일단 등록금이 싸니까 별 부담이 없었지요."

대학생이 돼서는 남다른 사업 수완도 발휘했다.

서울 돈암동 다락방에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한 사설 수학학원을 차렸던 것. 당시만 해도 과외 단속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터라 가난한 고학생이 생활비를 벌기에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한 달 수입이 당시 대기업 직원들의 월급보다 10배나 많은 20만~30만원에 달했다.

"당시 웬만한 집 한 채값이 150만원 정도 하던 때니까 엄청난 고소득자였던 셈이죠. 정식으로 학원을 차려 사업을 해볼까도 진지하게 생각했는데 그냥 포기했어요.

좀더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국의 CEO 나의청춘 나의 삶] (29) 신훈 금호아시아나 건설부문 부회장
대학 졸업 무렵에 그가 선택한 첫 직장이 대한항공이었다.

향후 항공사업의 발전 가능성이 높아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수학 전공을 살려 전산직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신 부회장이 대한항공에 입사할 때만 하더라도 항공예약 시스템이란 게 직원들이 일일이 손으로 적고 지우는 원시적인 형태였다.

입사하자마자 그에게 떨어진 특명이 바로 '온라인 프로그램' 개발이었다.

당시 국내에선 '온라인'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라 회사에선 신입사원인 그를 캐나다의 한 온라인시스템 개발업체로 파견을 보냈다.

"캐나다에 처음 가니까 미개한 나라에서 왔다고 연구에 끼어주지도 않고 엄청 무시하더라고요.

벤쿠버에 한국 교민이 4명밖에 없던 때거든요.

어느 날 연구실 컴퓨터가 고장나서 애를 먹었는데 내가 나서서 고치니까 그때부터 인정해 줬어요. 밤마다 프로그램 관련 책과 매뉴얼을 몰래 카피해 호텔에서 새벽까지 열심히 공부했지요.

얼마 뒤 국내에 돌아와서 전산팀 주도로 2년 반 만에 모든 업무에 온라인 환경을 적용했어요.

전 세계 항공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지요."

이후 삼환기업이란 건설업체와 한국신용평가 등을 거친 뒤 1988년 아시아나항공 출범과 함께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인연을 맺게 됐다.

"한 직장에서 편할 만하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참지를 못하겠더군요.

남이 안해본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그런 도전정신이 내 인생에 큰 힘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그냥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았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의 인생 성공 비결로는 이 같은 도전정신과 함께 오뚜기처럼 쓰러지지 않는 집념을 꼽을 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힘든 순간이면 언제나 주문처럼 외우던 문구가 있다.

바로 '청년아, 불평을 하지 말고 울지를 말어라. 노력과 인내야말로 쓰라린 인생을 광명으로 이끄는 참된 안내자이다.

살아서 굴욕과 천대와 멸시를 받음보다는 차라리 분투 중에 쓰러짐을 택하라'는 문장이다.

학창시절 유명한 영어강사였던 안현필씨의 영어 참고서에 적혀 있던 글로, 처음 읽는 순간부터 그의 인생에 좌우명이 됐다.

외환위기 이후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금호건설을 맡아 정상화시키는 어렵고 힘든 과정에서도 그에게 힘을 불어넣어준 원동력이 됐다.

"요즘 젊은 세대를 보면 참 똑똑하고 자기 주장도 강하고 우리 세대와는 다른 가능성을 느낄 수 있어 보기만 해도 뿌듯합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하고 한두 번의 실패에 좌절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집념을 갖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싸워 부딪치면 좋은 결과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이정호 한국경제신문 건설부동산부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