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과학문명이 왜 유럽에서 발전하게 됐을까?

[고전속 제시문 100선] (35) 앨프리드 W. 크로스비 '수량화 혁명'
10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은 이슬람이나 중국에 비해 문명의 발전이 한참이나 뒤떨어진 지역이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를 즈음 유럽인들은 다른 문명에 앞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근대화를 이뤄나갔다.

이후 유럽 제국주의는 탁월한 항해술과 우수한 무기를 바탕으로 다른 대륙을 정복했고, 20세기 초까지 식민지 지배를 계속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근대 과학문명의 발전이 굳이 유럽에서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수량화 혁명』(The Measure of Reality)의 저자 알프레드 W. 크로스비(1931~ )는 중세 후반과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유럽인들의 특정한 사고방식에서 답을 찾는다.

20세기 미국 역사학자인 크로스비는 유럽인들의 새로운 사고방식을 '수량화'와 '시각화'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이야기한다.

1250년 이후 200~300년 동안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은 큰 변화를 겪는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근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실재(reality)를 설명하는 세계관이 질적인(qualitative) 모델에서 양적인(quantitative) 모델로 바뀐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의 철학적 사고방식과 중세 교회의 성스러운 상징체계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유럽인들은 수학과 계측을 연결시켜서 숫자를 통해 인지 기능한 실재를 이해하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에너지, 실천과 인식을 균질한 단위의 집합체로 인식하고 셀 수 있는 수량으로 시각화한다.

양적인 개념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사고방식은 모든 영역에서 유럽인의 머릿속에 서서히 자리잡아간다.

기계시계의 발명으로 인한 시간의 측정, 위도와 경도의 정확한 표현으로 인한 공간의 측량, 인도-아라비아 숫자체계의 도입으로 인한 수학의 추상화·일반화 등은 수량화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혁명을 가속화한다.

보표의 발명으로 인한 음악 악보의 기록, 원근법의 도입으로 인한 사실적(寫實的)인 회화의 출현, 복식부기의 발명으로 인한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상업의 출현 등에서 시각화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특징이 드러난다.

◆원문 읽기

서구는 현금 경제 체제로 진입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 생활의 모든 항목은 단일한 기준으로 환원되었다.

머튼 칼리지에서 강의하고 있던 14세기의 인물 월터 벌리는 "판매 가능한 모든 물건은 곧 측정된 물건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밀과 보리, 귀리, 호밀, 사과, 향료, 털, 명주, 그리고 조각과 그림에 가격이 매겨졌다.

(중략) 가격은 모든 것을 수량화했다.

[해설]=수량화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토대는 경제 체제의 변화에서 비롯한다.

농업 생산력이 상승했으며, 상업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옛 도시는 확장되고 새 도시가 생겨났다.

매매와 환전에 종사하는 새로운 인간형―부르주아지(bourgeoisie)―이 생겨나 사회의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팔 수 있는 모든 물건에 가격을 붙였으며 소비자는 필요로 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에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이자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불어난다는 사실에서 시간이 곧 돈이라는 인식이 생겨났으며, 시간 역시 수량화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나타났다.

◆원문 읽기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시간은 분절되지 않은 흐름이었다.

그 때문에 실험자와 어설픈 기계공들은 시간의 물 흐르는 듯한 진행 과정을 모방하면 그것을 측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수세기 동안 헛수고를 했다.

(중략) 이 문제는 시간을 매끄럽게 흐르는 연속체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일정한 길이를 가진 순간의 연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해결될 수 있었다.

(중략)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마을의 시계는 수십만 명이 매일같이 바라보고, 매일 밤낮으로 거듭 되풀이하여 소리를 듣는 복잡한 기계였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흔적도 없는 시간이라는 것이 일정한 단위의 집합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해설]=시간은 인간과 세계의 존재 상황이다.

인간은 시간을 끊어지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대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시간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물이나 모래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실용적인 시계를 만들 수 없었다.

물은 얼거나 증발하고, 모래는 엉겨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연속적인 흐름으로 보지 않고 일정한 단위의 연속으로 측정하려는 발상은 실린더와 추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시계를 만들어 내었다.

지동기구라 불리는 간단한 진동 기구에 의해 시간은 규칙성을 획득했고 비로소 수량화되었다.

시간의 수량화는 구름 낀 날이나 화창한 날, 낮이 긴 여름이나 밤이 긴 겨울을 가리지 않고 동일한 시간관념을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주었다.

특히 사고파는 일이 이미 수량화의 추세에 따라 이루어지던 도시 주민들에게 시계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안겨주었다.

◆원문 읽기

서구 음악이 그레고리안 성가의 단순성에서 폴리포니의 복잡성으로 이동해 가면서 그것은 동시에 수도원과 시골에서 성당과 도시로 옮겨갔으며, 이는 곧 대학과 시장의 영역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작곡가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동하는 물리적 현상인 음을 미세한 세부까지 통제하게 되었다.

그들은 실재하는 시간에서 음악을 추출하고 그것을 양피지나 종이 위에 기록하여 음과 기호가 밀접하게 연결되는 만족할 만한 기보법을 만들었다.

[해석]=단선율 성가인 그레고리안 성가가 처음 불리던 시절엔 음악을 적절하게 기록할 방법이 없었다.

이 무렵의 유럽인들은 기억에 의존해서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작곡가들은 음악을 기록할 수단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기보법을 만들어냈다.

아울러 음악이 지속되는 시간을 측정하기 위하여 박자(tempo) 시스템이 고안되었다.

정형화된 규칙에 의해서 음표의 길이와 음정의 높낮이가 악보에 기록되었다.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청각 인식의 음악이 수량화되고 시각화된 것이다.

기보법은 또한 음악의 발전을 이루어내었다.

2개 이상의 단선율로 복잡하게 표현되는 폴리포니는 음악의 기법을 다양하게 발전시켰으며 직업적인 음악가가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원문 읽기

복식부기 덕분에 유럽 상인들은 수량적인 기준에 따라 정확하고 간결하게 정리된 기록을 만들 수 있었고,이를 통해 자기들이 영위하는 경제생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세부사항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돈의 영향력은 대차대조표에서 웅변적으로 나타난다.

돈은 절대로 중간적이지 않다.

회계사가 장부에서 모든 것을 플러스, 혹은 마이너스로 나눌 때마다 모든 경험을 이것이나 저것으로 범주화하려 드는 우리의 성향은 타당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일곱 세기 동안 부기는 철학이나 과학이 이룬 어떤 단일한 혁신보다도 사람들이 실재를 인식하는 데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데카르트와 칸트가 한 말에 대해 곰곰 생각한 사람의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열성적이고 근면한 성향을 가진 수백만의 다른 사람은 간결한 장부에 항목을 열심히 기입했고 세계가 자기들 장부에 들어맞게 되기를 바랐다.

[해석]=르네상스 시대의 상인들은 하나의 페이지에 나란히 자산과 채무를 정리하는 복식부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복식부기는 장부상으로 모든 수입과 손실이 최종적으로 일치하도록 작성되었다.

복식부기는 예전 같으면 흩어져 없어져 버리고 말았을 대량의 자료들을 정리하고 검토하여 모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유럽의 상인들은 상업과 제조업, 그리고 행정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복식부기를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다.

비용과 수익의 균형에 생계를 걸고 있는 사람들이 수행한 빈틈없는 실천의 산물이기도 했다.

효율적이고 정확하며 체계적인 복식부기의 기록방식은 근대인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수입과 손실 외의 다른 가치가 존재할 수 없는 복식부기의 체제는 제3의 논리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식부기의 철저하게 수량화된 기록방식은 철학자나 과학자의 이상적이고 수준 높은 이야기보다도 유럽인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런 사고방식의 변화는 유럽인에게 효율성과 속도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근대 과학에 대한 입문서이기도 하다.

동양은 왜 서양에 뒤떨어졌는지를 이해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언제 어느 대학에서든 『수량화 혁명』의 몇 귀절을 인용하면서 논술문제를 출제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논술 제시문의 보고라고도 할 만한 책으로 강력하게 일독을 추천한다.

양충공 S·논술 선임연구원 newage@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