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 사대주의 버리고 청나라 실용문을 배우자"
고전의 중요성과 가치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이다.
'북학(北學)'이란 북쪽의 학문 즉,청나라의 학문을 뜻하며 '의(議)'는 논의한다는 뜻이다.
박제가에게 청나라는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 및 훌륭한 기술을 두루 갖춘 문명의 본고장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북학의』 서문에서 중국 문물을 배우려는 박제가의 세심한 관찰력과 속 깊은 헤아림을 솔개와 개미의 비유를 들며 멋진 말로 칭찬한다.
여기서 박제가가 열심히 배운 북학은 우주론이나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며 반드시 수레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뜻한다.
그리고 벽돌의 효용성,기와 만드는 기술,위생적으로 장 담그는 방법,50~60섬의 곡식을 더 수확하기 위한 경작방법,남의 글을 표현하는 것 이상이 아닌 과거제도를 당장 고쳐야 할 급박함 등을 의미한다.
『북학의』를 읽다보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내내 풀리지 않는다.
'왜 박제가는 사대주의자라는 비판과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가면서까지 조선이 나아가야할 오직 유일한 길은 중국을 본받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주장한 것일까?'선비 박제가를 향한 감탄과 존경,그리고 불편한 감정들이 교차하면서 책을 다 읽어갈 무렵 비로소 스스로 답하게 된다.
자,그럼 선비 박제가를 통해 200여년 쯤 거슬러 올라가 세상을 둘러보자.
1.선비 박제가가 바라본 18세기 조선시대 실상은 이랬다.
◆원문 읽기
[내편-궁실편] 우리나라는 천 호나 되는 큰 고을에도 반듯하고 살 만한 집이 한 채도 없다.
(중략) 창이 찢어지면 해진 버선으로 막기도 하는데,이런 것들을 보노라면 근본적인 본(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러면 장차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결국 중국을 본받는 것보다 나은 길이 없는 것 같다.
[내편-저자(市井)편] 중국 역대 왕조에서는 사실 사치하다가 망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검소한데도 쇠퇴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이것은 물건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용할 줄을 모르니 생산할 줄도 모르고,생산할 줄 모르니 백성은 나날이 궁핍해 가는 것이다.
[내편-장사꾼] 중국 사람들은 가난하면 장사꾼이 되는데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다.
거기서는 장사꾼으로 나서도 그 사람의 풍류(風流)와 명예는 그대로 인정한다.
(중략) 우리나라 같으면 그런 신분으로 시장에 출입하면 모두들 비웃을 것이다.
(중략) 겉치레만 알고 꺼리는 일이 너무 많다.
사대부(士大夫)는 놀고 먹으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외편-이희경의 농기도(農器圖) 서(序)를 붙임]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을 임용하는 데 오로지 문벌만을 따진다.
(중략) 자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귀하신 몸이 된 데다가 또 부자여서 농사일을 직접 하지 않게 되었으며,어떤 심한 자는 종종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다.
서민은 또 모두 눈을 뜨고도 글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받은 바도 없으므로 어리석고 무식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힘으로써만 일을 할 뿐이다.
[외편-강남,절강과의 통상을 제의하는 글]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들이 가난하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먼저 먼 지방의 물자가 잘 유통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그런 다음에야 재물을 늘리고 온갖 도구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조선조 400년 동안에 딴 나라 배가 한 척도 오지를 않았다.
▶ 해설=박제가에게 자신의 나라인 조선은 작고 가난한 나라다.
백성은 보고 배운 게 없어 정교한 기술을 익히지 못했으며 거칠고 조잡함은 습관이 되었다.
물건을 잘 만들지 못하고 잘 이용할 줄도 모른다.
물건을 이용할 필요를 모르니 생산도 못한다.
궁핍함과 진정한 검소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날이 가난해진다.
가난하면 장사라도 해서 가난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하는데 겉치레만 신경쓴다.
사대부들은 콩과 보리조차 구분할 줄 모르고 놀고 먹는 한량이다.
조선은 다른 나라와는 아무런 무역활동도 없는 미개한 나라다.
'북학의' 전체를 통해 박제가의 한탄소리가 들린다.
2.구호와 선동,그리고 자신의 편에서 백성과 나라의 이익을 말하지 않았다.
◆원문 읽기
[외편-관론(官論)]관직에 청(淸)과 탁(濁)이 있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국가의 본의(本意)는 아닐 것이고 문벌이 생긴 이후부터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얼굴색은 아주 좋아 보이지만 오줌 누기를 싫어해서 사흘 동안 오줌을 누지 않으면 그는 죽고 말 것이다.
같은 몸뚱이 속에 있는 것치고 어느 것 하나 나의 것이 없는 것과 같이,같은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또한 어느 것 하나 나에게 소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중략) 백성에게 공덕을 남기고 국가를 위해서 힘을 다한 것은 벼슬이 높았을 때나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중략) 모름지기 벼슬에 청한 것과 탁한 것이 있다면,청한 벼슬에는 반드시 다투어 달려들 것이고,탁한 벼슬에는 반드시 서로 피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다투면 사이가 서로 벌어지게 되는 것이고 피하면 일이 안 되는 법이다.
당파가 성립되어 권력이 아래에 있고 위로 넘어오지 않으면,임금은 무슨 낙(樂)으로 정치를 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벼슬에 청탁이 있다는 것이 국가의 본의(本意)가 아니라는 것이다.
▶ 해설=백성과 나라를 지독스러운 궁핍에서 벗어나 향기로운 꽃에서 사는 문명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관직 청탁을 멀리하고 나라는 벼슬아치에게 처자식을 먹여살릴만한 충분한 녹봉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당파(黨派)는 임금의 권력 아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임금이 즐겁게 정치에 임할 수 있다.
또한 백성과 국가를 위하는 길에는 벼슬의 높낮이가 있을 수 없으며 문벌에 의해 벼슬의 높낮이가 결정되어서도 안 된다.
박제가는 적극적인 정치개혁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백성과 나라를 실질적으로 위할 구체적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3.선비 박제가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원문 읽기
[내편-교량편] 지금 성 안에 있는 돌다리는 모두 평평하므로 큰 비가 오면 물이 언제나 넘치곤 한다.
고을 사이를 통하는 큰 길에도 한 해 이상 견디는 다리가 없을 정도다.
두 갈래로 나무를 깔고 솔잎을 덮은 다음 흙을 덮고서 다니는데 말의 발이 자주 빠지곤 한다.
때로는 무너지는 것을 염려해서 백성을 동원하여 물에 들어가서 다리 교각을 붙잡고 있게 했는데,과연 무너지려는 다리를 건너다 사람과 말이 다 넘어지는 것을 능히 사람의 힘으로 구할 수 있겠는가? 그 근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으니 우리의 현 실정이 이와 같은 것이다.
(중략) 지금 때도 없이 백성을 종일토록 물 속에 서 있게 한다면 저 다리는 무엇하러 세워놓았는가 말이다.
나는 백성들이 더운 철인데도 추워서 떠는 것을 보고 하도 민망해서 사신(使臣)에게 다리 잡은 짓을 속히 없애도록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헛된 일들이 하도 많으니 백성이 어찌 번거롭지 않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백성을 편하게 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들이 제대로 일을 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일을 잘 할 수 있게 된 뒤에라야 정치하는 사람들이 베개를 높게 하고 누울 수 있을 것이다.
▶ 해설=청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조선을 돌아보면 가난하고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다.
더 한탄스러운 점은 도무지 청나라의 뛰어난 점을 적극적으로 배우려 하지 않는 게으름과 허세다.
박제가의 현실인식은 가능하고 날카로우며 박식하다.
그는 예리하게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청나라의 문물을 보고 배우고자 하였다.
그의 왕성한 관심과 세심한 관찰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그것은 백성과 나라를 진정으로 위하고자 함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과 나라의 이익을 진정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이 '북학의' 전체를 통해서 절절히 느껴진다.
백성이 더이상 궁핍하지 않고 삶에 있어 고매함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으며 나라는 부강하여 큰 손님이 오더라도 넉넉하게 대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나라가 박제가가 꿈꿨던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박제가의 '북학의'를 읽다 보면 분명 불편해지는 감정이 올라온다.
그 불편한 감정에는 자신을 타자와 비교해서 보고 싶지 않으며,자신을 자신으로서 긍정하고 싶은 욕망이 끓고 있다.
명나라가 망하고 중화가 사라진 뒤 조선을 소중화로까지 인식하고자 했던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야만스러운 청나라를 배우자'는 박제가의 현실인식은 대단히 불온하고,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상으로 느껴졌음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결국 박제가를 비롯한 서얼 출신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인재를 무성하게 하려는 정조의 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정조의 죽음은 박제가의 피맺힌 탄식을 낳는다.
"선왕의 뜻은 경장(更張,사회·정치적으로 부패한 모든 제도를 개혁함)에 있었네/
악의 근원을 씻어내고 기강을 회복코자 하셨지/
그분의 향기가 중도에서 끊겼으니/
수척하고 느른해진 나라의 운명을 누가 다시 일으킬고."
김옥란 S·논술 선임연구원 ybus030@nonsul.com
고전의 중요성과 가치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이다.
'북학(北學)'이란 북쪽의 학문 즉,청나라의 학문을 뜻하며 '의(議)'는 논의한다는 뜻이다.
박제가에게 청나라는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 및 훌륭한 기술을 두루 갖춘 문명의 본고장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북학의』 서문에서 중국 문물을 배우려는 박제가의 세심한 관찰력과 속 깊은 헤아림을 솔개와 개미의 비유를 들며 멋진 말로 칭찬한다.
여기서 박제가가 열심히 배운 북학은 우주론이나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며 반드시 수레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뜻한다.
그리고 벽돌의 효용성,기와 만드는 기술,위생적으로 장 담그는 방법,50~60섬의 곡식을 더 수확하기 위한 경작방법,남의 글을 표현하는 것 이상이 아닌 과거제도를 당장 고쳐야 할 급박함 등을 의미한다.
『북학의』를 읽다보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내내 풀리지 않는다.
'왜 박제가는 사대주의자라는 비판과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가면서까지 조선이 나아가야할 오직 유일한 길은 중국을 본받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주장한 것일까?'선비 박제가를 향한 감탄과 존경,그리고 불편한 감정들이 교차하면서 책을 다 읽어갈 무렵 비로소 스스로 답하게 된다.
자,그럼 선비 박제가를 통해 200여년 쯤 거슬러 올라가 세상을 둘러보자.
1.선비 박제가가 바라본 18세기 조선시대 실상은 이랬다.
◆원문 읽기
[내편-궁실편] 우리나라는 천 호나 되는 큰 고을에도 반듯하고 살 만한 집이 한 채도 없다.
(중략) 창이 찢어지면 해진 버선으로 막기도 하는데,이런 것들을 보노라면 근본적인 본(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러면 장차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결국 중국을 본받는 것보다 나은 길이 없는 것 같다.
[내편-저자(市井)편] 중국 역대 왕조에서는 사실 사치하다가 망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검소한데도 쇠퇴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이것은 물건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용할 줄을 모르니 생산할 줄도 모르고,생산할 줄 모르니 백성은 나날이 궁핍해 가는 것이다.
[내편-장사꾼] 중국 사람들은 가난하면 장사꾼이 되는데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다.
거기서는 장사꾼으로 나서도 그 사람의 풍류(風流)와 명예는 그대로 인정한다.
(중략) 우리나라 같으면 그런 신분으로 시장에 출입하면 모두들 비웃을 것이다.
(중략) 겉치레만 알고 꺼리는 일이 너무 많다.
사대부(士大夫)는 놀고 먹으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외편-이희경의 농기도(農器圖) 서(序)를 붙임]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을 임용하는 데 오로지 문벌만을 따진다.
(중략) 자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귀하신 몸이 된 데다가 또 부자여서 농사일을 직접 하지 않게 되었으며,어떤 심한 자는 종종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다.
서민은 또 모두 눈을 뜨고도 글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받은 바도 없으므로 어리석고 무식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힘으로써만 일을 할 뿐이다.
[외편-강남,절강과의 통상을 제의하는 글]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들이 가난하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먼저 먼 지방의 물자가 잘 유통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그런 다음에야 재물을 늘리고 온갖 도구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조선조 400년 동안에 딴 나라 배가 한 척도 오지를 않았다.
▶ 해설=박제가에게 자신의 나라인 조선은 작고 가난한 나라다.
백성은 보고 배운 게 없어 정교한 기술을 익히지 못했으며 거칠고 조잡함은 습관이 되었다.
물건을 잘 만들지 못하고 잘 이용할 줄도 모른다.
물건을 이용할 필요를 모르니 생산도 못한다.
궁핍함과 진정한 검소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날이 가난해진다.
가난하면 장사라도 해서 가난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하는데 겉치레만 신경쓴다.
사대부들은 콩과 보리조차 구분할 줄 모르고 놀고 먹는 한량이다.
조선은 다른 나라와는 아무런 무역활동도 없는 미개한 나라다.
'북학의' 전체를 통해 박제가의 한탄소리가 들린다.
2.구호와 선동,그리고 자신의 편에서 백성과 나라의 이익을 말하지 않았다.
◆원문 읽기
[외편-관론(官論)]관직에 청(淸)과 탁(濁)이 있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국가의 본의(本意)는 아닐 것이고 문벌이 생긴 이후부터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얼굴색은 아주 좋아 보이지만 오줌 누기를 싫어해서 사흘 동안 오줌을 누지 않으면 그는 죽고 말 것이다.
같은 몸뚱이 속에 있는 것치고 어느 것 하나 나의 것이 없는 것과 같이,같은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또한 어느 것 하나 나에게 소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중략) 백성에게 공덕을 남기고 국가를 위해서 힘을 다한 것은 벼슬이 높았을 때나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중략) 모름지기 벼슬에 청한 것과 탁한 것이 있다면,청한 벼슬에는 반드시 다투어 달려들 것이고,탁한 벼슬에는 반드시 서로 피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다투면 사이가 서로 벌어지게 되는 것이고 피하면 일이 안 되는 법이다.
당파가 성립되어 권력이 아래에 있고 위로 넘어오지 않으면,임금은 무슨 낙(樂)으로 정치를 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벼슬에 청탁이 있다는 것이 국가의 본의(本意)가 아니라는 것이다.
▶ 해설=백성과 나라를 지독스러운 궁핍에서 벗어나 향기로운 꽃에서 사는 문명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관직 청탁을 멀리하고 나라는 벼슬아치에게 처자식을 먹여살릴만한 충분한 녹봉을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당파(黨派)는 임금의 권력 아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임금이 즐겁게 정치에 임할 수 있다.
또한 백성과 국가를 위하는 길에는 벼슬의 높낮이가 있을 수 없으며 문벌에 의해 벼슬의 높낮이가 결정되어서도 안 된다.
박제가는 적극적인 정치개혁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백성과 나라를 실질적으로 위할 구체적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3.선비 박제가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원문 읽기
[내편-교량편] 지금 성 안에 있는 돌다리는 모두 평평하므로 큰 비가 오면 물이 언제나 넘치곤 한다.
고을 사이를 통하는 큰 길에도 한 해 이상 견디는 다리가 없을 정도다.
두 갈래로 나무를 깔고 솔잎을 덮은 다음 흙을 덮고서 다니는데 말의 발이 자주 빠지곤 한다.
때로는 무너지는 것을 염려해서 백성을 동원하여 물에 들어가서 다리 교각을 붙잡고 있게 했는데,과연 무너지려는 다리를 건너다 사람과 말이 다 넘어지는 것을 능히 사람의 힘으로 구할 수 있겠는가? 그 근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으니 우리의 현 실정이 이와 같은 것이다.
(중략) 지금 때도 없이 백성을 종일토록 물 속에 서 있게 한다면 저 다리는 무엇하러 세워놓았는가 말이다.
나는 백성들이 더운 철인데도 추워서 떠는 것을 보고 하도 민망해서 사신(使臣)에게 다리 잡은 짓을 속히 없애도록 요구하였다.
이와 같이 헛된 일들이 하도 많으니 백성이 어찌 번거롭지 않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백성을 편하게 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들이 제대로 일을 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일을 잘 할 수 있게 된 뒤에라야 정치하는 사람들이 베개를 높게 하고 누울 수 있을 것이다.
▶ 해설=청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조선을 돌아보면 가난하고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다.
더 한탄스러운 점은 도무지 청나라의 뛰어난 점을 적극적으로 배우려 하지 않는 게으름과 허세다.
박제가의 현실인식은 가능하고 날카로우며 박식하다.
그는 예리하게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청나라의 문물을 보고 배우고자 하였다.
그의 왕성한 관심과 세심한 관찰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그것은 백성과 나라를 진정으로 위하고자 함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과 나라의 이익을 진정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이 '북학의' 전체를 통해서 절절히 느껴진다.
백성이 더이상 궁핍하지 않고 삶에 있어 고매함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으며 나라는 부강하여 큰 손님이 오더라도 넉넉하게 대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나라가 박제가가 꿈꿨던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박제가의 '북학의'를 읽다 보면 분명 불편해지는 감정이 올라온다.
그 불편한 감정에는 자신을 타자와 비교해서 보고 싶지 않으며,자신을 자신으로서 긍정하고 싶은 욕망이 끓고 있다.
명나라가 망하고 중화가 사라진 뒤 조선을 소중화로까지 인식하고자 했던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야만스러운 청나라를 배우자'는 박제가의 현실인식은 대단히 불온하고,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상으로 느껴졌음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결국 박제가를 비롯한 서얼 출신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인재를 무성하게 하려는 정조의 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정조의 죽음은 박제가의 피맺힌 탄식을 낳는다.
"선왕의 뜻은 경장(更張,사회·정치적으로 부패한 모든 제도를 개혁함)에 있었네/
악의 근원을 씻어내고 기강을 회복코자 하셨지/
그분의 향기가 중도에서 끊겼으니/
수척하고 느른해진 나라의 운명을 누가 다시 일으킬고."
김옥란 S·논술 선임연구원 ybus030@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