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하고 촉촉하고 둥근' 시간 이야기

◆제이 그리피스(Jay Griffiths)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영어를 강의하고 있으며 ‘London Review of Books’, ‘Guardian’, ‘Observer’, ‘Red Pepper’지와 자신이 부편집장으로 있는 ‘Resurgence Magazine’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저력있는 여류 작가이다.

공간에 대한 시민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거리시위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첫 소설 『Anarchipelago』를 출간했다.


◆원문읽기

영국의 물리학자 M 패러데이는 1812년 B 아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짧은 것,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것,가장 작게 나눌 수 있으면서도 가장 길게 늘일 수 있는 것,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환을 많이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위대한 것에게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해설=답은 '시간'이다. 제이 그리피스는 『시계 밖의 시간』을 통해 시간을 중심으로 문화,공간,문명 등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한글로 출판된 지 이제 겨우 3~4년 정도의 '시간'만이 흘렀음에도 성균관대(2006학년도 수시 2학기 자연계 학교장 추천전형),서강대(2007학년도 수시 1학기 예시 문항) 등의 논술 제시문으로 인용되었으며,내용 그 자체로 이미 고전의 가치를 담고 있는 책이다.

『시계 밖의 시간』은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광범위한 소재와 시간을 관련지으며 해박한 지식을 펼치기 때문에 읽으면서 다소 산만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번득이는 직관과 통찰은 그러한 아쉬움을 극복할 만한 매력을 제공한다. 기말고사 이후 시간이 남는 친구들은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갖고 일독하기를 권한다. 생각하는 힘은 천천히 고민하고 곱씹을 때 성장하는 것이다. 객관식 시험은 빠름과 친하지만 독서는 느림과 친할 수밖에 없다.

◆원문읽기

설령 시간이 완벽하게 규칙적인 박동을 지니고 있을지라도,인간의 삶 속에서 시간은 그와 같은 기계적인 규칙성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이 든 사람은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한숨 쉬지만,어린 아이들은 잠시도 참지 못해 안달한다. 어린아이에게 한 시간은 얼마나 길까? 어른의 한 시간보다 너무나 너무나 길다.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몇 시간 기다렸다가 먹으라고 하는 것은 어른이 술 한 잔을 하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리는 것과 진배없다.

일반적으로 어른들은 시계시간을 습득했다. 하지만 (우리와 세대가 다른) 어린아이들은 시간의 대양의 심장 속에,영원한 지금 살고 있다. 작가 N K 나라얀은 유년시절을 "시간을 세지 않고 하루를 흘러가게 하는 시기,영원성 속에서 존재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아이라 해도,어린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영원한 현재는 몰입한 현재이고 자연발생적인 현재이며,유연한 현재다. 아이들은 시간엄수를 고집스럽고도 통쾌하게 거역하며 천부적으로 근대성의 지배적인 시계를 경멸한다.

▶해설=시간은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화장실이 급한 아이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보내는 젊은이가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개인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동일한 시간도 길이가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시간 체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때문에 각 사회가 어떠한 시간 체계를 갖고 있느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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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구를 지배하고 있는 시계(11시48분)나 캘린더(2001년 9월8일)는 시간 그 자체의 느낌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숫자만이 끝없이 나열된다. 그곳에는 심장도 없거니와 부드러운 깃털 또한 없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 그 지역 고유의 시간 구분 방식과 구분 근거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회는 비록 한 주(週)가 3일에서부터 16일까지 다양하지만 주(週)라는 형태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7일을 한 주로 형상화했으며 이것을 유대-기독교가 채택했다. 잉카 사람들은 8일로 이루어진 주를 사용했다.(그리고 주말마다 왕은 아내를 바꾸었다) 시간을 신으로 숭배했던 마야 사람들은 260일 주기를 캘린더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 단위로 여겼는데,아마 이것이 임신에서 출산까지 아홉 달의 시간을 표상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설=지역 고유의 시간 구분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이 자연적,사회적 삶의 여건을 반영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실측되는 실체라기보다는 한 사회가 전제하고 있는 문화나 종교,의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시간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나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문읽기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시간의 묘사방식은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이다. 오늘날 서구의 수적인 시간,강박적으로 분할하고 원자화하고 측정하고 계산하는 시간개념은 저 뉴턴의 "절대적이고 수학적인 진리의 시간개념"을 무기로 해서 시간의 다양성과 고유성을 말살하기 시작했던 산업사회와,저 가련한 프랭클린에게서 "시간은 돈이다"를 배워 시간에 충만해 있는 은총과 자비를 비천하고 무자비한 시간 세기로 고갈시켜 버린 후기 산업사회와 이데올로기적으로 너무도 궁합이 잘 맞다.

세슘시계에서 근대성의 시간은 분할은 되지만 구분은 되지 않는다. 이 분열의 시대에 걸맞게 디지털시계는 시간을 융합이 아닌 분열의 도구로 파편화시킨다. 시간은 살아 숨쉰다는 아메리카 토착민의 믿음과 달리,디지털시계는 시간의 원자화를 통해 개성을 지워버리는 만성적인 찰나주의로 '지금'에 생명을 불어넣기보다 그 숨통을 죄고 있다.

이에 부응하는 사회적 리듬 또한 존재하는 바,오늘날의 공동체는 파편화되고 쪼개졌으며 그 중 한 파편 속에서 당신은 끊임없이 시계를 들여다본다.

▶해설=역사적으로 개인은 한 사회의 시간 체계가 제공하는 규칙 속에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시간 체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정 사회의 시간 체계는 당대의 지배적 이념이 반영되어 있고,유리한 시간 체계를 모든 사회부분에 강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효율성 증대의 목적을 달성한다. 하지만 과정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던 고유하고 개별적인 시간들은 사라진다. 동양의 음력이 서양의 양력에 자리를 내어준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읽기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시간은 자연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노동방식,추수시기나 양털 깎는 계절,이 모든 것이 농촌의 농사리듬과 함께했다. 중세사학자 J 르고프가 쓰고 있듯이 그것은 '서두름에서 자유롭고 정확성에 무관심하며 생산성에 개의치 않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성장하면서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도시의 노동과 사회생활은 전혀 자연에 의존하지 않았으며,그곳에서는 시간이 '구조화되었다'. 시계 장치가 자연의 리듬을 대체했던 것이다. 오늘날 시골의 시간은 도시보다 훨씬 천천히 흐른다는 것은 거의 진부한 표현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휴일이면 도시를 떠나 시간이 '더 많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 왜냐하면 그곳은 도시보다 시간측정이 덜 되기-시계가 적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시계는 사실 시간의 대립물이다.

자연이 시간으로 충만해 있다면,도시 생활은 시계로 넘쳐흐른다. 시청의 시계에서부터 로마도시의 기원을 역사의 출발로 삼는 로마인들에 이르기까지,상징적으로 시간 측정은 도시화와 밀접하게 공명한다. 기독교교회-이들의 이교도와의 싸움은 자연에 대항한 도시화의 추구라 할 수 있다-는 시계 장치에서 자신들의 우군을 발견했다. 현실생활이나 형이상학적인 면 모두에서 시간의 규율은 기독교와 부합했다.

▶해설=시간을 통제하면 일상생활과 사회를 통제할 수 있으며,때문에 시간체계를 결정하는 데는 정치·경제·사회·종교적 배경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효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시간체계를 선택하고 사회 성원들의 삶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느림이나 게으름은 삶의 정당한 방식으로 존중받지 못하고,도덕적으로 단죄된다. 사실 1각(15분)을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여유로움과 1분1초를 아끼며 따지는 현대인들의 조급증을 함께 비교하기는 힘들 것이다. 게으름을 죄악으로 여기는 시간관에서의 여유와 오후 2시부터 낮잠을 즐기는 스페인의 시간관념은 다를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시계 밖의 시간』은 풍부하고 여성적이고,촉촉하고 둥근 시간을 이야기한다. 재미있고 특색 있는 책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게 해주는 이러한 서적들을 통해 지적 자극을 충분히 즐기기를,그렇다고 해서 굳이 익숙한 것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해석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자연현상을 토대로 만들어낸 물리적 시간이 자의적이며 인위적이어서 원시적인 감성을 무디게 할 수는 있지만,일상생활과 사회를 규율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시간을 관리할 수 있게 만든다는 현실적인 효용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체계화와 세분화에 따른 혜택을 '현재''우리'가 받고 있다는 현실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을 읽고 감동만 하지 말고 가끔은 의문도 던져보자.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남태균 S·논술 원장 ok@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