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유대인 학살 … "악은 평범한데서도 나온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독일에서 출생, 성장. 한때 하이데거의 연인으로, 또 야스퍼스의 제자로 지내며 철학을 공부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던 1933년 독일을 떠나 프랑스로, 1941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1951년에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정치사상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이후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혁명론』 등 여러 저작을 남겼다. 이중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보고서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은 이른바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인해 숱한 논쟁을 낳는다.

사후에 출간된 주요 저작으로는 『정신의 삶』이 있다.

◆ 칼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핵심 책임자다. 그의 지휘로 유럽 전역에서 잡혀와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 수는 약 600만명. 아이히만은 독일 패전 후 1960년 5월까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서 가족과 함께 숨어 살다가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체포돼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1962년 5월 3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했던 독일인들도 적지 않았다.

많은 지식인들이 해외로 망명했지만,어떤 사람들은 국내에서 나치의 명령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친위대로 징집됐다가 이를 거부해 사형을 당한 청년들의 편지도 남아있다.

이들은 처형당하기 전날 가족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두 사람은 그런 끔직한 일로 우리의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었기에 죽음을 선택했다.

반면 아이히만의 옳고 그름은 뒤집혀져 있었다.

그에게는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일이야말로 옳은 일이었다.

그는 600만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그 행위를 하는 데 비열한 동기가 없었고 또 악행이라는 의식도 없었다"고,그는 재판정에서 주장했다.

그래서 자신은 무죄라고 했다.

재판 내내 아이히만은 '기소장이 적시하는 범죄와 관련해 자신은 무죄'라는 주장을 폈지만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소장은 그가 고의로 행동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비열한 동기를 갖고 있었고 또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범죄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인지한 상태에서 행동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명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했다면 분명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시인했다.

그런데 그가 했던 '명령받은 일'이란 것이 결국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치밀한 계획 하에 죽이는 것이었다.

재판에 참여한 여섯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다.

의사 가운데 한명은 "아이히만은 나보다 더 정상"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의사들은 아이히만이 정상일 뿐만 아니라 매우 바람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판정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에게서 들어보자.

아렌트는 '정신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하다고 판정받은' 아이히만이 어떻게 그런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를 설명했다.

그 핵심은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이다.

◆원문읽기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중략)그는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히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이었다.

▶해설=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스스로의 개인적인 발전에 몰두해 산다.

아이히만은 나치 전체주의 체제를 돌리는 톱니바퀴 중 하나의 '톱니'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아이히만은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정상적이며 평범했다.

유대인들에게서 엄청난 반감을 불러온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아렌트의 표현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 기초해 있었다.

나치즘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현실을 말하고 생각하지 못하고,자신의 판단력에 기초해 현실을 판단하지 못하는 무능의 평범함이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뼈아프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시 아이히만처럼 평범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아렌트의 표현처럼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살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아이히만의 범죄는 의무와 복종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치에 맹종했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원문읽기

그는 갑자기 자기가 전 생애에 걸쳐 칸트의 도덕교훈,특히 칸트의 의무에 대한 정의에 따라 살아왔다는 것을 아주 강조하며 선언하듯 말했다.

이는 표면상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왜냐하면 칸트의 도덕철학은 맹목적인 복종을 배제하는 인간의 판단 기능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아이히만은 정언명법에 대한 거의 정확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칸트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가 말하려 한 것은,나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인 법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설=앞서 언급했듯,아이히만은 히틀러를 비롯한 상부의 명령이 아니었더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복종이 곧 도덕적 의무였던 것이다.

물론 칸트는 아이히만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맹종에 반대한다.

칸트는 인간의 자율적인 판단 능력에 의해 정당화할 수 있는 행위만을 의무로서 인정한다.

칸트가 실천이성이라고 명명한,도덕적인 측면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보편적인 이성적 능력이 그 자율적인 판단능력이다.

그 능력에 기초한다면,맹목적인 복종은 당연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자율적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칸트의 정언명법을 다음과 같이 곡해했다.

◆원문읽기

"만일 총통(히틀러)이 당신의 행위를 안다면 승인할 그러한 방식으로 행위하라"라는 식으로 말이다.

칸트는 분명히 이런 종류의 어떤 것도 말할 의도를 갖지 않았다.

반대로 칸트에게는 모든 사람이 행위를 시작하는 그 순간 입법자다.

(중략) 칸트적 정신이란,인간은 법에 대한 복종 이상을 행해야 한다는 요구,단순한 복종의 요구를 넘어서서 법의 배후에 있는 원리(법이 발생하는 원천)와 자신의 의지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요구 뿐이다.

◆해설=
아이히만은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자율적 판단능력 대신 히틀러의 의지를 판단기준으로 삼아 행동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는 인간이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부품이며,개이기를 원했다.

그가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더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개가 아니었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다.

이 얼마나 우습고도 슬픈 역설이란 말인가.

앞서 언급된 칸트의 정언명법은 인간을 수단으로서만 대해서는 안 되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또 다른 정언명법을 내포한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가 강조하는 자율적 판단능력,즉 사유의 능력은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는 능력과 관련된 것이다.

나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곧 처형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일으킬 혼란상을 통제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최후의 순간까지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게 했다고 한다.

물론 샤워기에서 분출된 것은 물이 아니라 지클론 B 등의 독가스였다.

그렇게 희생되어 가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아이히만의 양심도 가책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기름을 짜 비누를 만드는 행위를,머리카락을 뽑아 양탄자를 만드는 행위를 그렇듯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인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침묵했던 대다수 독일인들 역시 아이히만처럼,그리고 우리들처럼 평범하지 않았을까.

그들도 우리처럼 많이 벌고 많이 소비하고 많이 배우려 하되,자신의 힘으로 현실을 사유하고 표현하는 것에는 무능하지 않았을까.

이석연 S·논술 선임연구원 blachand@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