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시험의 제시문(텍스트)은 대개 동서양의 고전들과 시사 이슈, 교과서 등의 범주에서 출제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논술이 다루는 영역은 갈수록 폭넓고 다양해지면서 철학적인 문제 뿐아니라 예술도 논술의 주제로 등장한다.

이에 따라 회화를 비롯 애니메이션과 영화, 광고, 사진도 논술의 텍스트로 제시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논술거리가 되는 셈이다.

논술에서 다루는 주제와 텍스트가 무엇이든 간에 변치 않는 게 있다면 논술은 사고력을 평가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고력을 평가하는 데 반드시 문자로 된 제시문만 사용될 이유는 없다.

문자 텍스트뿐 아니라 그림,사진 등 이미지도 사고 대상이란 점에서 또다른 텍스트인 것이다.

이미지 텍스트를 즐겨 출제하는 사례로는 연세대와 한양대가 대표적이다.

두 대학은 거의 매년 정시 논술에서 이미지를 제시문으로 내놓는다.

"지난해 연세대 논술에는 조지 허버트의 시,주역의 괘(卦) 해석 등이 제시문으로 나왔다.

연세대가 제시문을 선택하는 기준이라고 밝힌 '한국 및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고전을 포함한 다양한 소재'에 충실했던 셈이다.

여기에 주역의 괘 이미지가 첨부됐고,2005학년도에도 티치아노의 그림 '인간의 세 시기'가 나왔는데 이 같은 예술 작품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은 적지 않다."(이재용 연세대 입학처장)

"지난해 논술을 참고하자면, 1600~1700자 분량에 시간은 150분이고 지문은 세 개가 나왔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물으며 현재와 미래의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를 사진과 그림으로 주고,영화 대사의 한 토막도 제시문으로 냈다.

이처럼 제시문의 유형은 미술,음악 등으로 계속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차윤경 한양대 통합논술개발위원장)

이는 2008학년도 정시 논술을 어떻게 출제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연세대와 한양대 측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답변한 내용이다.

연세대는 2003학년도 정시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을,2005학년도 정시에서 티치아노의 '인간의 세 시기'를 각각 출제하였는데, 특히 2003학년도 문제는 논제 자체가 예술비평이나 미학적 소견을 묻는 주제였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그림이 출제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한양대는 2006학년도 정시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휴머노이드 이미지를 출제했으며, 2007학년도 수시 1학기에서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과 다양한 사진을 제시했다.

여기에다 서울대도 이미지 자료를 출제할 가능성이 높다.

서울대는 2008학년도 예시 문항에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안면의 '몽유도원도'를 제시문으로 포함한 문제를 선보였다.

따라서 서울대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이라면 지난 2일부터 내년 2월10일까지 서울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20세기 팝아트의 대가인 '앤디 워홀 그래픽전'을 방학 동안 감상해볼 필요가 있다.

수험생들로선 고전이나 시사이슈를 따라잡기도 벅찬데 이젠 예술까지 챙겨봐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표면적인 변화에 불과할 뿐, 내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세상에 대한 풍부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가진 학생이라면 글이든 그림이든 논술에 임하는 데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논술에선 단골 주제와 제시문이 존재한다.

동서양 고전 중에서 유독 '장자'가 단골 제시문으로 자주 출제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장자'는 다양하고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며,쉬운 듯하면서도 매우 어렵다.

창의적이고 심층적인 사고력을 측정하는 데에는 '장자' 만큼 좋은 게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 분야에서 장자에 비견할 만한 작가는 누구일까? 뭐니뭐니해도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를 들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예술작품 이상의 가치를 지녀,예술적이라기보다는 철학과 논리를 그림이란 형식에 담아 표현한 철학 작품에 가깝다.

'장자'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 이야기를 생각해보자.나비꿈을 꾸고 나서 내가 나비꿈을 꾼 것인지, 지금 나비가 인간이 된 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평범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소리다.

마그리트의 그림 '이미지의 배반'은 어떠한가? 파이프를 그려 놓고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았다.

이 또한 얼마나 허무한 말장난인가? 하지만 논술시대엔 장자나 마그리트처럼 상식을 뛰어넘은 사고,상식과 보편적 기준에 도전하는 창의적·비판적 사고가 요구된다.

이런 깊은 생각과 친해지고 싶다면 장자와 함께 마그리트의 그림을 반드시 감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중한 에듀한경 연구원 doodut@ed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