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롤스의 『정의론』은 서울대 고려대를 비롯해 많은 대학에서 제시문으로 내고 있는 고전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롤스 이전과 이후로 정의론에 대한 학문의 역사가 구분된다"고 할 정도로 그를 높게 평가했다.

롤스의 『정의론』은 모두 읽어내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다.

700쪽이 넘는데다 철학 전공자가 아니면 읽기에도 지루하다.

또 논술 문제를 풀기 위해 두꺼운 고전을 모두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의론』이 무엇이며 어떤 문제를 다뤘는지에 대해선 반드시 알아둬야 한다.

생글생글 고전읽기를 통해 존 롤스 『정의론』에 대해 맛보기라도 해보자.

1.책의 구성

『정의론』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학문적 탐구 과정이다.

무엇을 정의롭다고 하는가에 대한 논리적 정당성을 추구하는 사고 과정이기도 하다.

이 책은 1부 원리론,2부 제도론,3부 목적론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가 정의를 논하는 데 어떤 논리적 전제가 필요한지를 논한 것이 1부이다.

2부는 정의의 원칙을 현실세계에 적용할 때 어떤 기준들이 필요한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검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수결 원칙이란 무엇인지,분배적 정의는 무엇인지,양심의 자유란 무엇인지 등 우리가 정치·생활 속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정치적 주제들을 논하고 있다.

벌써 머리가 복잡해지는 학생이라면 다음의 질문들을 보자.

[경우 1] 4명의 친구에게 떡 3개가 주어졌다.

떡을 어떻게 나누어 먹으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까?

[경우 2] 4명의 친구가 고스톱을 쳤는데 그 중 1명은 따고 3명은 잃었다.

그런데 돈을 잃은 친구는 도박이 나쁜 것이라며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주장처럼 도박은 불공정한 것인가?

[경우 3] 2003년 정부가 전북 부안에 핵폐기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적이 있다.

부안 주민들은 거세게 항의했지만 대다수 국민은 핵폐기장 건설에 찬성했다.

과연 정부의 이 결정은 공정한 것일까?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우리는 정의의 개념을 동원하게 된다.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정의론은 떡을 이렇게,저렇게 나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떡을 나누는 방법에 대한 논리적 탐구,원칙에 대한 설명과정이 바로 정의론이 다루는 과제다.

위의 예화들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공동체에서 발생하게 마련인 여러 시빗거리를 축소해 그려놓은 것들이다.

인간사회는 구성원 간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충돌과 분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충돌을 해결하는 방식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 사회의 규범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다른 누구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지 않는 사회,즉 유토피아가 아니라면 위와 같은 문제들은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유토피아와 구별되는 현실사회의 특징은 모든 이를 만족시켜줄 재화가 부족하며,개인과 개인은 서로 상충되는 이해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데에 있다.

또한 재화가 풍부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이기심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한 노력과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을 믿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이같은 현실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롤스도 이에 동의한다.

◆원문읽기

공동적인 이상에 합의하는 종교적 집단체에 있어서는-만일 그러한 공동사회가 있다면-정의에 대한 논의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는 공동의 종교가 정해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기심 없이 일할 것이며 정당성 여부에 관한 모든 문제는 이러한 목적을 참조해서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중략) 사회란 비록 상호 간의 이익을 위한 협동체이기는 하지만,그것은 이해관계의 일치뿐만 아니라 이해관계의 상충이라는 특성도 동시에 갖는다.

또한 사람들은 그들의 노력에 의해 산출될 보다 큰 이득의 분배 방식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며,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적은 몫보다는 큰 몫을 원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상충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완전한 현실사회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쉽지 않으며 사실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나마 덜 불완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려고 노력해왔다.

지금까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이론은 공리주의적 원칙이다.

공리주의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원칙에 가장 충실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공리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전체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부당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 원칙이 계속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것보다 덜 나쁜 이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롤스는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원칙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정의의 원칙'이다.

2.정의란 무엇인가 -공정성(fairness)으로서의 정의

정의에 관한 대표적인 책으로 플라톤의 『국가론』을 떠올리게 된다.

『국가론』의 부제는 바로 '정의에 대하여'이다.

그러나 존 롤스의 '정의'는 플라톤의 그것과는 범주가 다르다.

플라톤의 정의론은 보편적 윤리사상으로서의 정의에 대한 것이며,롤스의 정의론은 정치·사회적 범주에서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롤스는 정의를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라고 정의(define)한다.

공정성(fairness)이란 올바름이나 평등이란 개념보다 좁고 구체적이다.

스포츠게임에서 '페어플레이(fair play)'라고 할 때의 공정함이 바로 롤스가 말하는 공정성과 비슷한 개념이다.

여러 개인들이 사회공동체를 꾸려나가며 충돌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일종의 게임이라고 본다면,개인들 간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규정을 게임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롤스는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를 크게 두 가지 원칙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평등의 원칙이며,두 번째는 차등(불평등)의 원칙이다.

이 두 가지 원칙에서 알 수 있듯이 롤스의 『정의론』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차등을 인정하는 자유주의를 절충한 이론이다.

우리 상식으로는 자유와 평등은 대립되며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양극에 놓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롤스는 자유와 평등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를 배제하지 않을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나름대로 구축해냈다.

롤스의 해결법은 결과로서의 평등이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는 절차와 형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가능하다.

게임의 규칙이 공정하다면 게임의 결과에 무관하게 공정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3.정의의 제1원칙-평등의 원칙

◆원문읽기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본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평등한 시민적 자유란 이미 보장된 것으로 간주되며,따라서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은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득의 계산에도 좌우되지 않는다.

이 같은 정의의 제1원칙은 개인의 평등과 인권에 대한 선언으로,매우 교과서적이고 상식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공리주의에서는 이 원칙이 첫 번째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리주의라는 이념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표어로 요약되는데,그래서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그래서 공리주의 원리로는 노예제와 인종차별 등을 비판할 근거를 마련할 수가 없다.

공리주의의 첫째 원칙은 '효율성의 원칙'이라 할 수 있다.

효율성은 평등이나 개인의 권리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롤스는 이렇게 비판한다.

◆원문읽기

합리적인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기본 권리와 이해관계에 미칠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전체 이득의 산술적인 총량을 극대화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기본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공리의 원칙은 상호이익을 위해 모인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적 협동체라는 관념과는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롤스는 공리주의의 불평등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그래프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고전 속 제시문 100선] (20) 존 롤스 '정의론' (상)
X1과 X2에게 분배될 일정량의 재화가 있다고 가정하자. 위에서 한 점의 (a,b)좌표는 각각 X1과 X2에게 분배되는 재화의 양을,좌표(a,b)의 합은 재화의 총량을 나타낸다.

그리고 곡선 AB는 재화의 총합(a와 b의 합)이 같은 점들의 집합이다.

효율성의 원칙에서 볼 때 곡선 AB상의 모든 점들은 곡선 안쪽의 점들보다 우월하며,동시에 상호 간에 동등하다.

심지어는 점 A나 점 B도(한쪽에 모든 재화가 쏠린 경우) 곡선 AB상의 다른 점들과 동등하며 차별되지 않는다.

반면에 평등의 원칙에서는 곡선 AB보다는 직선 OD를 우선적으로 보게 된다.

직선OD는 X1과 X2가 평등한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45도선에 근접한 점 D가 AB선상의 다른 점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F와 같은 곡선 안쪽의 점들도 C와 같은 점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 2007학년도 수시 1학기 논술 [문제 3]은 위 그래프를 응용한 것이다.

정부는 치료율을 최대화하며 어느 정도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선택과,치료율은 덜하지만 좀 더 평등한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위 그래프에서 첫 번째 선택은 점 C에,두 번째 선택은 점 F에 대입시킬 수 있다.

공리주의 원칙을 철저히 따른다면 AB선상의 C를 선택할 것이다.

반면 정의의 원칙에 따른다면 C보다 F를 선택할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 회에 계속)

이중한 에듀한경 연구원 doodut@ed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