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년)
1724년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가난한 집안의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뒤늦게 50대에서야 모교인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어 80세에 죽을 때까지 철학사에 남을 대저작들을 남겼다.
칸트는 데카르트에서 시작한 합리론과 베이컨에서 시작된 경험론을 종합,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다.
그의 인식론 윤리학 미학에 걸친 종합적·체계적인 작업은 뒤에 생겨난 철학사조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저서로 비판 3부작인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이 있다.
데카르트 '합리론' + 베이컨 '경험론' 철학적 사유 새로운 한 시대 열어
1.칸트의 이상주의 vs 공리주의
재화(財貨,goods)는 욕망의 대상이다.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따뜻한 집과 음식보다 선(善)한 것이 있겠는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도 자선(慈善,charity)은 물질적 원조를 의미한다.
또 'good'은 '유효함'으로 번역하는 때는 대상의 '실질적 결과나 영향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면에 사람들은 때로 의지의 선함을 문제 삼기도 한다.
평소에 잊어버리고 살다가 연말만 되면 고아원·양로원에 라면상자를 들여놓고 기념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을 보며,뜻이 옳지 못하면 물질적 도움도 선행(善行)이라고 부르기를 꺼린다.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는 전자의 관점을 공리주의로,후자의 관점은 이상주의적 윤리관으로 부르는데 이 둘의 구분선을 따라가다 보면 서양 합리주의의 모든 국면을 만난다.
행위의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시한 칸트는 어떤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그 자체가 목적인 무조건적 명령으로서의 도덕 법칙을 제시했다.
즉 조건이 붙는 가언 명령이 아니라,의무의 성격을 띤 정언 명령을 제시한 것이다.
가언 명령은 뭐고 정언 명령은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하는 학생이 드물다.
'가언(假言)'은 형법 조항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예컨대 '사람을 죽인 자는 ~형에 처한다'는 법조문은 가언 명령이다.
이 명령을 읽은 잠재적 범죄자는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만족과 그에 대한 처벌의 경중을 비교해 사람을 살해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이 처벌의 강도를 넘어서면 과감히 살해 행위로 나아간다.
말하자면,형법 조문은 살해 행위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자에게 절대로 사람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는 득실을 저울질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으로 족할까? 국가의 처벌이나 사회적 평판이 두려워 사람을 살해하지 않기로 한 자와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를 무조건 거부하는 자를 놓고 누구를 선하다고 할 것인가? 이런 명령을 윤리의 근원으로 삼으면 양심의 명령에 의해 생명을 보호한 자와 실리적 판단에 따라 살인을 포기한 자가 동일한 윤리적 평가를 받게 된다.
반면에 '사람을 살해하지 말라'는 정언 명령은 전제조건 없이 무조건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의 10계명이나 불교의 계율,유가의 가르침이 모두 그렇다.
다만 칸트의 형이상학적 윤리학이 다른 점이라고는 윤리와 패륜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는 인간을 인도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말하는 점뿐이다.
결국 칸트의 윤리적 이상주의는 부처의 '자비(慈悲)'와 만나고 예수의 '사랑'과 만나고 간디의 '비폭력'과 만난다.
『윤리와 사상』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이상주의적이다.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행위할 때 항상 보편적 입장에 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도덕적 원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보편성'은 언제 어디서든,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성질이다.
따라서 타인을 기꺼이 살해하는 자는 또 다른 타인이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를 용납해야 한다.
칸트의 이 말은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을 내밀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하다.
즉 타인이 나를 폭행하고 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현실적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거나 범죄에 범죄로 맞서서는 안 된다.
이 대목에서 칸트가 무조건적 명령의 형태로 윤리의 근원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던 이유를 엿볼 수도 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신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삶의 목적을 다했던 중세인의 비합리적 윤리를 극복하기 위해 그 자리에 '보편적 이성'을 끼워 넣었다.
이제 칸트의 세계에서 인간은 신의 명령에 따라 살아간다기보다는 신(자연)의 뜻을 '발견'해내고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의무'를 지고 살아가게 된다.
한편 현실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이 항상 윤리적 판단을 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공리주의자들은 윤리적 행위를 무조건적 의무로 규정한 칸트의 윤리관을 이상주의라고 부른다.
공리주의자들은 '사람을 살해하지 말라'는 무조건적 명령이 사람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평가하고 행위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언제나,무조건 윤리적 명령에 복종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공리주의자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질을 방임하고 장려하면서 윤리적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훨씬 현실적이다.
결국 애덤 스미스나 제레미 벤덤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실제로 경험하고 확인할 수 없는 '행위의 동기'보다는 '행위의 결과'를 기준으로 윤리성을 판단한다.
이것이 공리주의적 윤리다.
공리적 관점에서는 윤리적 행위는 의무라기보다는 권리이며,결과적으로 사회 행복의 총량이 최대라는 결과에 도움이 된다면 그 행위는 윤리적이라고 판단한다.
2.서양 윤리의 대전제
벤덤 같은 공리주의자나 칸트와 같은 의무론자나 모두 인간은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기계처럼 기능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전제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대체 윤리적 평가는 무의미하다.
인간이 윤리적 행위와 비윤리적 행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그는 신의 뜻이건 혹은 유전자의 명령이건 간에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계는 그 동작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뜯어고치거나,버리거나,낮게 평가한다.
이처럼 근대 서양윤리는 자유를 대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인간은 유전자가 정하는 대로 필연적으로 작동하는 기계라는 생물학적 관점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인간이 기계라면,윤리적 명령은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비윤리적' 존재에 대한 처벌의 근거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그런 세계에서 비윤리적 행위를 한 인간은 회개하고 용서받기보다는 교정되고,버려지고,차별받는다.
(이 문제에 대한 생물학적 반론은,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스티븐 핑거의 『빈 서판』 참조)
자유를 전제조건으로 삼는 것은 의무론적 윤리(칸트)이건,공리주의적 윤리(벤덤)이건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유롭게 자신의 행위를 정할 수 있다고 전제한 후에야 그에게 선택의 동기와 결과에 대해 비난할 수 있다.
이제 비로소 윤리학은 인간에게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비난할 수 있다.
물론 중세의 신학적 숙명론도 윤리적 판단 근거가 된다.
문제는 그 실체가 신의 명령이냐,인간의 이성적 판단이냐가 다를 뿐이다.
중세가 근대에 밀려 뒤로 물러난 까닭은 근대 과학이 신의 부존재를 입증했기 때문이 아니다.
더 이상의 신의 명령이 인간의 윤리적 가치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3.『도덕 형이상학 원론』(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
형이상학이라면 벌써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이 있겠지만,우리의 경험세계,우리의 권한 밖에 있는 원리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말하자면 추상적 이론의 세계다.
그런데 도덕을 말하는 데 추상적 이론이 반드시 필요할까? 모든 사상가들이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특히 영국 경험주의 전통을 물려받은 공리주의 윤리학자들은 도덕 형이상학의 공허함,무기력함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도덕 명령의 근원지인 보편적 이성이란 게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윤리체계는 모든 때,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윤리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추상적 이론화로서 가치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때로는 보편적 윤리 기준이 개성을 짓누르는 율법과 관습으로 오작동하기도 하지만,선악의 기로에 서기 전에 미리(선험적으로,a priori) 선의 판단 기준을 선언하여 인간을 선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또 있다. 종교의 세계다.
윤대경 S·논술 압구정학원 부원장 ydkby2@nonsul.com
1724년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가난한 집안의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뒤늦게 50대에서야 모교인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어 80세에 죽을 때까지 철학사에 남을 대저작들을 남겼다.
칸트는 데카르트에서 시작한 합리론과 베이컨에서 시작된 경험론을 종합,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한 시대를 열었다.
그의 인식론 윤리학 미학에 걸친 종합적·체계적인 작업은 뒤에 생겨난 철학사조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저서로 비판 3부작인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이 있다.
데카르트 '합리론' + 베이컨 '경험론' 철학적 사유 새로운 한 시대 열어
1.칸트의 이상주의 vs 공리주의
재화(財貨,goods)는 욕망의 대상이다.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따뜻한 집과 음식보다 선(善)한 것이 있겠는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도 자선(慈善,charity)은 물질적 원조를 의미한다.
또 'good'은 '유효함'으로 번역하는 때는 대상의 '실질적 결과나 영향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면에 사람들은 때로 의지의 선함을 문제 삼기도 한다.
평소에 잊어버리고 살다가 연말만 되면 고아원·양로원에 라면상자를 들여놓고 기념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들을 보며,뜻이 옳지 못하면 물질적 도움도 선행(善行)이라고 부르기를 꺼린다.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서는 전자의 관점을 공리주의로,후자의 관점은 이상주의적 윤리관으로 부르는데 이 둘의 구분선을 따라가다 보면 서양 합리주의의 모든 국면을 만난다.
행위의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시한 칸트는 어떤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그 자체가 목적인 무조건적 명령으로서의 도덕 법칙을 제시했다.
즉 조건이 붙는 가언 명령이 아니라,의무의 성격을 띤 정언 명령을 제시한 것이다.
가언 명령은 뭐고 정언 명령은 뭐냐고 물어보면 대답하는 학생이 드물다.
'가언(假言)'은 형법 조항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예컨대 '사람을 죽인 자는 ~형에 처한다'는 법조문은 가언 명령이다.
이 명령을 읽은 잠재적 범죄자는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만족과 그에 대한 처벌의 경중을 비교해 사람을 살해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이 처벌의 강도를 넘어서면 과감히 살해 행위로 나아간다.
말하자면,형법 조문은 살해 행위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자에게 절대로 사람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는 득실을 저울질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으로 족할까? 국가의 처벌이나 사회적 평판이 두려워 사람을 살해하지 않기로 한 자와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를 무조건 거부하는 자를 놓고 누구를 선하다고 할 것인가? 이런 명령을 윤리의 근원으로 삼으면 양심의 명령에 의해 생명을 보호한 자와 실리적 판단에 따라 살인을 포기한 자가 동일한 윤리적 평가를 받게 된다.
반면에 '사람을 살해하지 말라'는 정언 명령은 전제조건 없이 무조건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의 10계명이나 불교의 계율,유가의 가르침이 모두 그렇다.
다만 칸트의 형이상학적 윤리학이 다른 점이라고는 윤리와 패륜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는 인간을 인도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말하는 점뿐이다.
결국 칸트의 윤리적 이상주의는 부처의 '자비(慈悲)'와 만나고 예수의 '사랑'과 만나고 간디의 '비폭력'과 만난다.
『윤리와 사상』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이상주의적이다.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행위할 때 항상 보편적 입장에 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도덕적 원리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보편성'은 언제 어디서든,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성질이다.
따라서 타인을 기꺼이 살해하는 자는 또 다른 타인이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를 용납해야 한다.
칸트의 이 말은 "누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을 내밀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하다.
즉 타인이 나를 폭행하고 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현실적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거나 범죄에 범죄로 맞서서는 안 된다.
이 대목에서 칸트가 무조건적 명령의 형태로 윤리의 근원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던 이유를 엿볼 수도 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신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삶의 목적을 다했던 중세인의 비합리적 윤리를 극복하기 위해 그 자리에 '보편적 이성'을 끼워 넣었다.
이제 칸트의 세계에서 인간은 신의 명령에 따라 살아간다기보다는 신(자연)의 뜻을 '발견'해내고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의무'를 지고 살아가게 된다.
한편 현실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이 항상 윤리적 판단을 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공리주의자들은 윤리적 행위를 무조건적 의무로 규정한 칸트의 윤리관을 이상주의라고 부른다.
공리주의자들은 '사람을 살해하지 말라'는 무조건적 명령이 사람들의 윤리적 행위를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평가하고 행위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언제나,무조건 윤리적 명령에 복종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공리주의자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질을 방임하고 장려하면서 윤리적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훨씬 현실적이다.
결국 애덤 스미스나 제레미 벤덤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실제로 경험하고 확인할 수 없는 '행위의 동기'보다는 '행위의 결과'를 기준으로 윤리성을 판단한다.
이것이 공리주의적 윤리다.
공리적 관점에서는 윤리적 행위는 의무라기보다는 권리이며,결과적으로 사회 행복의 총량이 최대라는 결과에 도움이 된다면 그 행위는 윤리적이라고 판단한다.
2.서양 윤리의 대전제
벤덤 같은 공리주의자나 칸트와 같은 의무론자나 모두 인간은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기계처럼 기능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전제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대체 윤리적 평가는 무의미하다.
인간이 윤리적 행위와 비윤리적 행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그는 신의 뜻이건 혹은 유전자의 명령이건 간에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계는 그 동작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뜯어고치거나,버리거나,낮게 평가한다.
이처럼 근대 서양윤리는 자유를 대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인간은 유전자가 정하는 대로 필연적으로 작동하는 기계라는 생물학적 관점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인간이 기계라면,윤리적 명령은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비윤리적' 존재에 대한 처벌의 근거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그런 세계에서 비윤리적 행위를 한 인간은 회개하고 용서받기보다는 교정되고,버려지고,차별받는다.
(이 문제에 대한 생물학적 반론은,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스티븐 핑거의 『빈 서판』 참조)
자유를 전제조건으로 삼는 것은 의무론적 윤리(칸트)이건,공리주의적 윤리(벤덤)이건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유롭게 자신의 행위를 정할 수 있다고 전제한 후에야 그에게 선택의 동기와 결과에 대해 비난할 수 있다.
이제 비로소 윤리학은 인간에게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비난할 수 있다.
물론 중세의 신학적 숙명론도 윤리적 판단 근거가 된다.
문제는 그 실체가 신의 명령이냐,인간의 이성적 판단이냐가 다를 뿐이다.
중세가 근대에 밀려 뒤로 물러난 까닭은 근대 과학이 신의 부존재를 입증했기 때문이 아니다.
더 이상의 신의 명령이 인간의 윤리적 가치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3.『도덕 형이상학 원론』(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
형이상학이라면 벌써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이 있겠지만,우리의 경험세계,우리의 권한 밖에 있는 원리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말하자면 추상적 이론의 세계다.
그런데 도덕을 말하는 데 추상적 이론이 반드시 필요할까? 모든 사상가들이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특히 영국 경험주의 전통을 물려받은 공리주의 윤리학자들은 도덕 형이상학의 공허함,무기력함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도덕 명령의 근원지인 보편적 이성이란 게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윤리체계는 모든 때,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윤리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추상적 이론화로서 가치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때로는 보편적 윤리 기준이 개성을 짓누르는 율법과 관습으로 오작동하기도 하지만,선악의 기로에 서기 전에 미리(선험적으로,a priori) 선의 판단 기준을 선언하여 인간을 선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또 있다. 종교의 세계다.
윤대경 S·논술 압구정학원 부원장 ydkby2@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