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는 황당한 이야기꾼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일단 재미있고,상상력을 자극하며,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묻어 있다.

또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장자의 이야기는 대학별 논술시험에서 제시문으로 단골 출제되고 있다.

생글생글에서도 이미 다루었던 인물이기는 하지만,앞서 다루지 않았던 여러 이야기 중에서 도(道)와 관련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아래의 글들은 지혜나 인식론과 관련한 제시문으로 출제될 가능성이 있는 내용들이다.

◆원문읽기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지적하여 말해 보시오."

"쇠파리에 있다."

"도가 어찌 그리 지저분한데 있는가?"

"가라지나 피 같은 잡초에 있다."

"어째서 더 하찮은 것에 있는가?"

"옹기 조각에 있다."

"왜 점점 더 심해지는가?"

"똥 오줌에 있다."

"…"

장자가 말하였다.

"당신의 질문은 본질을 물은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물을 벗어나 도를 이야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극한 도는 이와 같고,위대한 말도 이와 같다." <장자 '지북유(知北遊)'>

▶해설=사람들은 현실이 힘들면 다른 세계를 꿈꾸게 된다.

괴로운 현실 속에서 특히 인생의 진실,지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도(道)는 우리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고 장자는 이야기한다.

도를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지극히 소박한 사물 속에서 찾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장자는 도가 아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공자와 맹자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고상하고 순결한 대상으로서 도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장자의 이야기에서 도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직관적인 대상으로 변모한다.

도가 일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일까?

◆원문읽기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그 개구리가 살고 있는 좁은 곳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오.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별 수 없는 것은 그 벌레가 살고 있는 철(時)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오.한 가지 재주뿐인 사람에게 도에 대해 말해도 통하지 않는 것은 그가 받은 교육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오.그런데 지금 당신은 좁은 두 강가 사이에서 빠져 나와 대해(大海)를 보고 비로소 스스로가 얼마나 꼴불견인가를 깨달은 셈이오.당신은 이제 대도(大道)의 이치를 말할 수 있다 하겠소.천하의 물에는 바다보다 큰 것이 없소.수만의 강물이 이리로 흘러들어 언제 그칠지 모르는데 넘치는 일은 없소.바닷물이 새어나가는 곳에서 물이 새어나가 언제 멈출지 모르는데 텅 비는 일은 없소.봄가을로 변하는 일도 없고 홍수나 한발(旱魃)도 알지 못하오.그러니 이것은 양자강(揚子江)이나 황하(黃河)의 흐름에 비해 도저히 수량으로 잴 수가 없을 정도이오. <장자 '추수편(秋水篇)'>

▶해설=도(道)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도를 깨닫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존재한다.

장자는 대표적으로 '편견'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한된 환경에서 개별적인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숙명 자체가 '편견'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편견'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모든 지식이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겸손'은 당연한 태도일 것이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신의 짧은 경험으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자만하고 있지는 않은지,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함으로써 도에 도달할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앎에 대한 겸손은 남에 대한 배려보다 앞선 문제인 것이다.

◆원문읽기

포정이 문해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다.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소의 뼈와 살이 갈라지면서 서걱 서걱,빠극 빠극 소리를 내고,칼이 움직이는 대로 싹둑싹둑 울렸다.

그 소리는 모두 음률에 맞고,은(殷)나라 탕왕(湯王) 때의 명곡인 상림(桑林)의 무악에도 조화되며,또 요(堯) 임금 때의 명곡인 경수(經首)의 음절에도 맞았다.

문혜군은 "아,훌륭하구나.

기술도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말했다.

포정은 칼을 놓고 말했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입니다.

재주 따위보다야 우월한 것입죠.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온 모습은 눈에 안 띄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죠.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천리(天理)를 따라 소가죽과 고기,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 몸이 생긴 그대로를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번도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죠.평범한 보통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무리하게 뼈를 자르니까 그렇습죠.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죠." 문혜군은 "정말 훌륭하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양생의 비결을 알았도다"라고 말했다.

<장자 '양생주(養生主)'>

▶해설=칼로 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정보이다.

하지만 실제 소를 잡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장자는 소를 잡는 것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진정 도를 알기 위한 방법을 소잡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도(道)를 깨우친 소잡이는 마음으로 소를 본다.

눈에 보이는 소 각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소 잡는 원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소 장기의 기능과 구조에 대해서 수의사가 소잡이보다 많은 것을 알겠지만,소잡이보다 소를 잘 잡지는 못한다.

즉 많이 아는 것이 많이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속적으로 관찰하고,사고했기 때문에 소잡이는 도의 경지에 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는 비어 있는 틈새에 존재한다.

도는 비어 있기에 만물을 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소잡이는 만물의 정해진 순리를 파악하고 그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방식으로 도를 터득한 것이다.

자연의 순리를 파악하고,이에 순응하라는 것이 장자가 말하는 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장자의 주장은 문명을 건설하고 미래를 설계하려는 주체적인 인간상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판단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장자의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태균 S·논술 원장 ok@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