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드워드 윌슨 (Edward O. Wilson)

1929년 미국 출생.개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1956년부터 하버드대학 교수로 재임.20여권의 명저를 저술한 과학 저술가로서 『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개미』로 두 번의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사회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며,생물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친 20세기 대표 지성으로 꼽힌다.

주요 저서로 학문 간 대통합을 시도한 『통섭』을 비롯 『사회생물학ㆍ새로운 종합』,『인간 본성에 대하여』,『개미』,『생명의 다양성』,『자연주의자』 등이 있다.



여학생 A에게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해보자.

"남학생 B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애였어.어떤 교수님 강의가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서 수강 신청을 했는데,교수님이 모친상을 당하시는 바람에 첫 시간은 발표 팀만 짜고 휴강했거든? 그런데 그 B 남학생과 한 팀이 된 거야.그리고 그 다음 날 지하철에서 우연히 그 남자애를 만났는데 왠지 더 싫더라고.근데 얘가 내 옆자리에 앉더니 대뜸 뭐래는 줄 알아?근친상간에 관심있냐는 거야 글쎄!"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여학생 A의 뇌리에 어떤 생각들이 스쳐지나갈까? 남학생의 진의를 따질 새도 없이 우선 남학생을 더 불편하게 느꼈다면,그건 왜일까?

근친상간 금기야말로 우리의 영혼에 가장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윤리규범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근친상간에 '관심 있어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짐승'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 금기야말로 인간과 짐승을 구분해주는 가장 중요한 윤리규범이라고 마음 깊숙이 믿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근친상간 금기 등 인간의 윤리적 측면은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인가,아니면 생물학적 진화와 상관없는 인간 고유의 정신적 차원에 의해 생겨난 것인가? 질문 자체가 좀 어렵다.

여기서는 대다수의 철학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택해왔다는 점만 지적해두고,먼저 근친상간 금기에 대한 에드워드 윌슨의 답변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의 사회생물학적 관점은 근친상간이 야기하는 심각한 장애들에 주목한다.

근친상간에 의해 유전병을 발현시키는 열성 유전자가 100개가 넘고 체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아버지,형제,아들과 성 관계를 맺어 낳은 아이들의 경우 정상치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함 사례들은 동물 종에게서 더 많이 확인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적 관점의 특성이다.

◆ 원문읽기

근친상간 때 나타나는 병리학적 증상들은 자연선택을 집약적이고 명쾌하게 보여준다.

집단유전학의 기초 이론은 사소하거나 중요하거나 간에 근친상간을 회피하는 모든 행동 성향이 오래 전부터 인간 집단 전체에 퍼져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비근친 교배의 이점이 너무 많아 그에 따라 문화적 진화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생물학적 가설은 근친상간이 초래하는 유전자 적합성의 소실이 궁극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더 적은 수의 자손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생물학적 가설은 결합 배제와 근친상간 기피의 유전적 성향을 가진 개체들이 다음 세대에게 이 성향에 대한 더 많은 유전자를 제공하다고 말한다.

아마 자연선택은 수천 세대 동안 이 계통의 토대를 제공해 왔을 것이고,그 결과 인간은 결합 배제라는 단순하고 자동화한 규칙을 통해 본능적으로 근친상간을 기피한다.

▶해석=근친상간 행위를 배제하지 않는 유전자보다 배제하는 유전자가 번식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인간의 유전자는 근친상간 행위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에 따라 인간은 본능적으로 근친상간을 기피한다.

에드워드 윌슨은 또한 "각 사회가 근친상간의 파괴적인 영향을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었던 기회도 극히 드물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저서 전반의 논지와 관련시켜 정리해보면,이는 근친상간 기피 등 윤리규범 전반이 인간의 정신적 차원,즉 이성적 측면에 의해 합리적으로 선택된 결과가 아니라는 의미다.

윤리규범 같은 문화적 진화의 방향을 사실은 유전자 진화의 원리가 결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논리가 설득력을 얻을수록 생물학적 차원의 지배를 받는 것은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뿐이라며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차이에 주목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그들이 어디 일부 철학자들뿐이겠는가.

자신이 남학생 B의 발언에 대해 느낀 불쾌한 감정이 다른 동물 종보다 더 진화한 인간 유전자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이 여학생 A에게 어찌 낯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친상간 금기를 통해 살펴본 사회생물학적 관점은 성,이타주의,종교 등 사회적 행위의 보편적 범주들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생존과 더 많은 번식을 추구하는 유전자의 지배라는 생물학적 뿌리에서 자라난 열매들이다.

그리고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 각각의 비중과 양자의 관계가 여전히 핵심 논점이 된다.

따라서 에드워드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 원문읽기

여기서 제기되는 흥미로운 철학적 의문은 이렇다.

숭고한 도덕 가치들의 문화적 진화가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고 자체 추진력을 획득해 유전적 진화를 대체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전자는 문화를 가죽끈으로 묶어놓고 있다.

끈은 상당히 길지만 가치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유전자 풀(gene pool)에 미치는 결과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속박될 것이다.

뇌는 진화의 산물이다.

인간의 행동은-그것을 유도하고 지도하는 가장 깊은 감정적 반응 능력들처럼-인간의 유전 물질이 자신을 고스란히 보존해 가는 우회적 방법이다.

도덕은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어떠한 궁극적 기능도 갖고 있지 않다.

▶해석=유전자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관계는 리모컨과 무선 비행기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 이성이라는 무선 비행기가 스스로 날고 있는 것으로 믿고 싶어 하지만,실은 유전자적 진화라는 리모컨의 조종을 받고 있다.

따라서 문화적 진화가 유전자적 진화를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모컨의 조종을 받고 있는 무선 비행기가 어떻게 리모컨을 대체하고 스스로를 조종한단 말인가? 주의할 점은,에드워드 윌슨은 리모컨이 무선 비행기를 대체할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리 종교 관습 등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생물학적 진화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고 호소하지만,그걸 이해한다고 해서 윤리 종교 관습 등의 기능이 불필요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오히려 이에 못지않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 원문읽기

인간 유전학은 다른 모든 과학 분야와 더불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조만간 사회적 행동의 유전적 토대에 관한 많은 지식이 축적될 것이고,유전공학과 복제 기술을 이용해 유전자를 바꿀 수 있게 될 것이다.

적어도 완만한 진화적 변화는 기존의 우생학을 통해 실현 가능해질 것이다.

인간 종은 자신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

인간 종은 무엇을 선택할까? 부분적으로 낡아버린 빙하기의 적응 양상과 동일한,날림으로 지은 흔들거리는 토대 위에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더 많은-혹은 더 적은-감정적 반응 능력을 지닌 채 더 고도의 지성과 창조성을 향해 나갈까?

▶해석=하지만 에드워드 윌슨은 어떤 리모컨(어떤 인간 유전자)을 선택하느냐와 관련된 이 딜레마를 "나중 세대들이 해결할 문제"로 남겨 놓는다.

그렇다면 당면한 과제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만으로도 에드워드 윌슨의 주장은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낳게 된다.

◆ 원문읽기

인간 생물학의 주요 과제는 윤리학자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속박을 파악하고 측정하며,정신의 신경생리학적 및 계통학적 재구성을 통해 그 속박의 의미를 추론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그 뒤에 이어질 문화적 진화 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보완물이다.

그것은 사회과학의 풍요로움과 중요성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그것의 토대를 바꿀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것은 윤리학의 생물학을 빚어낼 것이고,그 생물학은 더 깊이 이해된 항구적인 윤리적 가치 규범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해석=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윤리학을 포함해 인문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내려지는 학문적 결정들에 유전자가 왜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비유컨대 이는 리모컨이 왜 어떤 식으로 무선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예컨대 윤리학의 경우 더 나은 윤리적 가치 규범을 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하지만,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주장은 극단적으로는 이렇게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겐 정말 네가 배울 것이 많아.그걸 배워서 네 학문의 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네 학문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질 거야.' 또한 그의 바람대로 인문사회과학 모든 분야의 생물학이 생긴다면 그러한 변화는 인간의 의식과 삶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떤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관을 수용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인가? 변화가 두려워서인가? 그게 아니라면 왜인가? 이석연 Sㆍ논술 선임연구원

이석연 Sㆍ논술 선임연구원 blachand@nons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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