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여 글자 수밖에 안 되는 '고전 중의 고전'이 있다.
무엇이냐고? 『대학』이다.
기독교인에게 하느님 말씀이 있고 불자에게는 부처님 말씀이 있는 것처럼 유학자에게는 공자의 가르침이 있다.
유학의 핵심적인 경전은 사서(四書)로 알려져 있는 『대학』,『논어』,『맹자』,『중용』이다.
흘러간 옛날 책이라고? 천만에.
중국의 현대사상가인 리쩌허우는 자신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문화심리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정신유산인 문화전통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쩌허우는 중국의 고대 사상을 박물관에나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반대하고 있다.
중국인들만을 위한 것일까?
1. 천년의 기다림
만일 어떤 책이 독립적인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와 주목받기까지 100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면,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런 책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은 본래 오경(五經: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의 하나인 『예기』 전 49편 중 제42편에 해당하는 글이었다.
그렇다면 『예기』 안에서 특별히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묵묵히 여럿 중 하나로 있었던 '대학'을 누가 흔들어 깨워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도록 한 것일까?
여기에는 당나라 한유로부터 시작하여 송나라 대학자인 주희(주자)의 정신적 스승인 정호,정이 형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학자가 관련되어 있다.
특히 서양인들에게는 새로운 유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주희에 이르러서,『대학』은 유가의 도(道)가 실려 있는 중요한 문헌으로 형성되었다.
주희는 『대학』의 내용을 세 가지 강령(명명덕 明明德,신민 新民,지어지선 止於至善)과 그 강령에 대한 실천 조목인 팔조목(격물 格物,치지 致知, 성의 誠意, 정심 正心, 제가 齊家, 치국 治國, 평천하 平天下)으로 분류하여 경 1장과 전 10장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주희가 병든 몸을 일으켜 임종 직전까지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붙들고 연구에 몰두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럼 왜 주희는 스스로 "다시 고친 곳이 많다"고 고백하면서까지 『대학』을 수정하는 작업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일까? 주희는 『대학』 교육의 중요성과 부흥의 역사적 사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문 읽기
공자의 3000을 헤아리는 제자들이 『대학』에 관한 설명을 듣지 않는 이 없었으나, 증자만이 홀로 그 정통을 얻어 해설을 지어 그 의미를 천명했다.
맹자가 세상을 떠나고서는 그 전통이 없어져 버렸으니 『대학』이라는 책이 있기는 하였으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중략) 이단적인 허무적멸(주희는 도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이와 같이 비판하였다)의 가르침은 고상함이 『대학』을 능가하나 실질이 없었다.
그밖에 권모술수 등 헛된 이름을 추구하는 학설과 백가중기의 부류는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들을 속여,인(仁)과 의(義)를 막았다. 그래서 군자는 불행하게도 큰 도(道)의 핵심을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소인들은 불행히도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중략) 천도(天道)의 운행은 순환하니 항상 가면 되돌아온다.
송나라의 덕이 융성하여 정치와 교육이 아름답고 밝아서 하남의 정씨 두 선생이 나오셔서 맹자의 도통을 잇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로 이 『대학』을 존중하여 믿기 시작하여 그 뜻을 밝히 나타내게 된 것이다.
2. 대학, 큰 배움의 길은 무엇인가?
◆원문 읽기
大學之道(대학지도)는 在明明德(재명명덕)하며 在新民(재신민)하며 在止於至善(재지어지선)이니라.대학(大學), 즉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
▶해석=우리가 열심히 공부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것? 그러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무엇이지? 『대학』에서 밝히는 큰 배움의 길은 무엇일까.
먼저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길은 사람이 타고난 착한 본성에서 나오는 밝은 덕(德),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밝히는 것이다. 착한 본성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우리 마음 속에 항상 빛나고 있다. 주희는 명덕(明德)을 거울에,명명덕(明明德)은 흐려진 거울을 닦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니까 인간의 욕심에 의해 가려지고 때로는 어둡게 된 밝은 덕을 노력하여 닦는다면 착한 본성이 밝게 드러날 수 있다는 말이다.
◆원문 읽기
탕왕의 반명(盤銘)에는,'진실로 새로워지고,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질지라'라고 하였다. 『강고』에는, '새로워지는 백성들을 진작시킨다'고 하였다. 『시경』에는 '주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극치를 적용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해석=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백성(국민)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신민(新民)'이라는 개념은 『대학』에서 논란이 많은 개념 중 하나다.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의 원문에는 '신민(新民)'이 아니라 '백성을 가까이 하여 함께 있다'는 뜻인 '친민(親民)'이었다.
'친(親)'은 관계의 일방성이 아닌 상호성을 나타내는 덕목이다. '친민'은 바로 임금과 백성 사이에 부자지간과 같은 친함이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속담처럼 친근한, 탕왕(하왕조의 걸왕이 가혹한 정치를 하여 혁명적 군사행동을 통해 걸왕을 토벌함)의 목욕하는 그릇에 새겨져 있었다는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라는 구절이 옛부터 '천명(天命:하늘의 명)'임을 들어 정이와 주희는 과감하게 '친'을 '신'으로 바꾸었지.왜 정이와 주희는 '친(親)'을 '신(新)'으로 고쳐 쓴 것일까? 이 점이 바로 전통적인 중국사회에서,더 좁혀 말한다면 송나라 이후 사회 전면에 나섰던 사대부들에게 나타난 유학의 정신 중 하나란다.
즉 유가는 백성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지.
◆원문 읽기
『시경』에,'꾀꼴꾀꼴 하는 꾀꼬리 언덕 한구석에 머물러 있도다'라 하였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새가 머무는 것도 제가 머물러 있을 곳을 아는 법인데 사람으로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느냐?"라 하셨다.
『시경』에 "훌륭하다, 문왕은, 아아 끊임없이 빛나게 공경스럽게 머물러 있도다"라 하였다.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자함에 머물러 있었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스러움에 머물러 있었고,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스러움에 머물러 있었고, 남의 부친이 되어서는 자애스러움에 머물러 있었고, 사람과 사귀게 되면 신용에 머물러 있었다.
▶해석=밝은 덕을 환하게 밝힌 공부하는 자가 새롭게 된 백성이든 친하게 된 백성이든 모두 함께 도달한 목적지가 바로 지선(至善)이다.
공부의 완성이다.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유학자들의 이상사회이며 왕도정치(王道政治)가 실현된 상태다.
지극한 선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공자는 한 모퉁이에 머물러 있는 새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사람도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 즉, 인자함, 공경함, 효성스러움, 자애스러움, 믿음이라는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고 본 것이다.
3. 큰 배움의 길로 어떻게 향해갈 수 있을까?
천년의 세월을 준비한 만큼 『대학』의 중요 개념을 둘러싼 수많은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아마도 '격물치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800여 년 동안의 논쟁은 유학자들에게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화두일 것이다.
끝으로 큰 배움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팔조목의 첫 번째,두 번째 항목인 '격물치지'와 관련된 『대학』의 맥락만 소개해 본다.
◆원문 읽기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사(事)에는 종시(終始)가 있으니, 선후(先後)를 가릴 줄 안다면 도(道)에 가깝다.
(중략) 천자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수신(修身)이 근본이다.
근본(本)이 엉망인데 말단(末)이 잘된 경우가 없다.
중시해야 할 것을 경시하고 경시해야 할 것을 중시하고서 잘된 경우란 없다.
이러한 이해가 바로 근본을 '아는 것'이고, 바로 '올바른 앎이 이르렀다'(知之至)는 말의 의미다.
김옥란 S·논술 선임연구원 ybus030@nonsul.com
무엇이냐고? 『대학』이다.
기독교인에게 하느님 말씀이 있고 불자에게는 부처님 말씀이 있는 것처럼 유학자에게는 공자의 가르침이 있다.
유학의 핵심적인 경전은 사서(四書)로 알려져 있는 『대학』,『논어』,『맹자』,『중용』이다.
흘러간 옛날 책이라고? 천만에.
중국의 현대사상가인 리쩌허우는 자신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문화심리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정신유산인 문화전통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쩌허우는 중국의 고대 사상을 박물관에나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에 반대하고 있다.
중국인들만을 위한 것일까?
1. 천년의 기다림
만일 어떤 책이 독립적인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와 주목받기까지 100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면,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런 책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은 본래 오경(五經: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의 하나인 『예기』 전 49편 중 제42편에 해당하는 글이었다.
그렇다면 『예기』 안에서 특별히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묵묵히 여럿 중 하나로 있었던 '대학'을 누가 흔들어 깨워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도록 한 것일까?
여기에는 당나라 한유로부터 시작하여 송나라 대학자인 주희(주자)의 정신적 스승인 정호,정이 형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학자가 관련되어 있다.
특히 서양인들에게는 새로운 유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주희에 이르러서,『대학』은 유가의 도(道)가 실려 있는 중요한 문헌으로 형성되었다.
주희는 『대학』의 내용을 세 가지 강령(명명덕 明明德,신민 新民,지어지선 止於至善)과 그 강령에 대한 실천 조목인 팔조목(격물 格物,치지 致知, 성의 誠意, 정심 正心, 제가 齊家, 치국 治國, 평천하 平天下)으로 분류하여 경 1장과 전 10장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주희가 병든 몸을 일으켜 임종 직전까지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붙들고 연구에 몰두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럼 왜 주희는 스스로 "다시 고친 곳이 많다"고 고백하면서까지 『대학』을 수정하는 작업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일까? 주희는 『대학』 교육의 중요성과 부흥의 역사적 사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문 읽기
공자의 3000을 헤아리는 제자들이 『대학』에 관한 설명을 듣지 않는 이 없었으나, 증자만이 홀로 그 정통을 얻어 해설을 지어 그 의미를 천명했다.
맹자가 세상을 떠나고서는 그 전통이 없어져 버렸으니 『대학』이라는 책이 있기는 하였으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중략) 이단적인 허무적멸(주희는 도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이와 같이 비판하였다)의 가르침은 고상함이 『대학』을 능가하나 실질이 없었다.
그밖에 권모술수 등 헛된 이름을 추구하는 학설과 백가중기의 부류는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들을 속여,인(仁)과 의(義)를 막았다. 그래서 군자는 불행하게도 큰 도(道)의 핵심을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소인들은 불행히도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중략) 천도(天道)의 운행은 순환하니 항상 가면 되돌아온다.
송나라의 덕이 융성하여 정치와 교육이 아름답고 밝아서 하남의 정씨 두 선생이 나오셔서 맹자의 도통을 잇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로 이 『대학』을 존중하여 믿기 시작하여 그 뜻을 밝히 나타내게 된 것이다.
2. 대학, 큰 배움의 길은 무엇인가?
◆원문 읽기
大學之道(대학지도)는 在明明德(재명명덕)하며 在新民(재신민)하며 在止於至善(재지어지선)이니라.대학(大學), 즉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
▶해석=우리가 열심히 공부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것? 그러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무엇이지? 『대학』에서 밝히는 큰 배움의 길은 무엇일까.
먼저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길은 사람이 타고난 착한 본성에서 나오는 밝은 덕(德),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밝히는 것이다. 착한 본성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우리 마음 속에 항상 빛나고 있다. 주희는 명덕(明德)을 거울에,명명덕(明明德)은 흐려진 거울을 닦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니까 인간의 욕심에 의해 가려지고 때로는 어둡게 된 밝은 덕을 노력하여 닦는다면 착한 본성이 밝게 드러날 수 있다는 말이다.
◆원문 읽기
탕왕의 반명(盤銘)에는,'진실로 새로워지고,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질지라'라고 하였다. 『강고』에는, '새로워지는 백성들을 진작시킨다'고 하였다. 『시경』에는 '주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극치를 적용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해석=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백성(국민)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신민(新民)'이라는 개념은 『대학』에서 논란이 많은 개념 중 하나다.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대학'의 원문에는 '신민(新民)'이 아니라 '백성을 가까이 하여 함께 있다'는 뜻인 '친민(親民)'이었다.
'친(親)'은 관계의 일방성이 아닌 상호성을 나타내는 덕목이다. '친민'은 바로 임금과 백성 사이에 부자지간과 같은 친함이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속담처럼 친근한, 탕왕(하왕조의 걸왕이 가혹한 정치를 하여 혁명적 군사행동을 통해 걸왕을 토벌함)의 목욕하는 그릇에 새겨져 있었다는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라는 구절이 옛부터 '천명(天命:하늘의 명)'임을 들어 정이와 주희는 과감하게 '친'을 '신'으로 바꾸었지.왜 정이와 주희는 '친(親)'을 '신(新)'으로 고쳐 쓴 것일까? 이 점이 바로 전통적인 중국사회에서,더 좁혀 말한다면 송나라 이후 사회 전면에 나섰던 사대부들에게 나타난 유학의 정신 중 하나란다.
즉 유가는 백성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지.
◆원문 읽기
『시경』에,'꾀꼴꾀꼴 하는 꾀꼬리 언덕 한구석에 머물러 있도다'라 하였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새가 머무는 것도 제가 머물러 있을 곳을 아는 법인데 사람으로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느냐?"라 하셨다.
『시경』에 "훌륭하다, 문왕은, 아아 끊임없이 빛나게 공경스럽게 머물러 있도다"라 하였다.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자함에 머물러 있었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스러움에 머물러 있었고,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스러움에 머물러 있었고, 남의 부친이 되어서는 자애스러움에 머물러 있었고, 사람과 사귀게 되면 신용에 머물러 있었다.
▶해석=밝은 덕을 환하게 밝힌 공부하는 자가 새롭게 된 백성이든 친하게 된 백성이든 모두 함께 도달한 목적지가 바로 지선(至善)이다.
공부의 완성이다.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유학자들의 이상사회이며 왕도정치(王道政治)가 실현된 상태다.
지극한 선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공자는 한 모퉁이에 머물러 있는 새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사람도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 즉, 인자함, 공경함, 효성스러움, 자애스러움, 믿음이라는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고 본 것이다.
3. 큰 배움의 길로 어떻게 향해갈 수 있을까?
천년의 세월을 준비한 만큼 『대학』의 중요 개념을 둘러싼 수많은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아마도 '격물치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800여 년 동안의 논쟁은 유학자들에게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화두일 것이다.
끝으로 큰 배움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팔조목의 첫 번째,두 번째 항목인 '격물치지'와 관련된 『대학』의 맥락만 소개해 본다.
◆원문 읽기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사(事)에는 종시(終始)가 있으니, 선후(先後)를 가릴 줄 안다면 도(道)에 가깝다.
(중략) 천자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수신(修身)이 근본이다.
근본(本)이 엉망인데 말단(末)이 잘된 경우가 없다.
중시해야 할 것을 경시하고 경시해야 할 것을 중시하고서 잘된 경우란 없다.
이러한 이해가 바로 근본을 '아는 것'이고, 바로 '올바른 앎이 이르렀다'(知之至)는 말의 의미다.
김옥란 S·논술 선임연구원 ybus030@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