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신문 8월 24일자 A39면

[다산칼럼]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

김인호 < 중소기업연구원 원장 >

요즘 여당의 지도부가 소위 '뉴딜'로 불리는 '경제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몇 차례 선거의 참패(慘敗) 원인을 경제의 실패에서 찾고 참패에서 온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 내년도 대통령 선거의 쟁점이 될 경제 문제의 고지를 선점하기 위함일 것이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재선 고지를 향한 현직 대통령 아버지 부시에 대해 크게 열세였던 촌뜨기 클린턴이 "문제는 경제야,바보야(It's Economy,Stupid)"라는 자극적인 구호로 '경제 살리기' 승부수를 던지고 서민층을 파고들어 승리한 것을 생각나게 한다. 안타깝다.

이러한 노력이 주요 당사자인 기업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정부조차도 등을 돌리고 있다는 점 때문은 아니다. 오죽 했으면 평소 소신이나 이념과는 거리가 먼 처방(處方)들까지 들고 나왔을까 하는 애처로운 생각 때문도 아니다.

진정 안타까운 것은 이들을 비롯한 여야 정치지도자들이 우리 경제문제의 핵심 소재를 모르거나 알고도 이를 회피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미국까지 볼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지도자들 중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한국적 '경제제일주의' 철학의 창시자 박정희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IMF 경제위기를 오히려 호기(好機)로 삼아 '준비된 경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7% 경제성장' 공약을 내건 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경제의 핵심 문제는 과거와 다르며 미국의 경우와는 더 다르다. 지금 정치권이 우리 경제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경기 침체,특히 소비 부진과 내수부문의 침체,일자리 창출의 부진,소위 양극화의 심화 등은 핵심적 문제가 초래(招來)한 결과일 뿐이다.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 기업의 투자 부진이라는 핵심 문제가 있다. 지난 5년간 기업의 설비투자가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이처럼 투자가 부진한 것이 과거같이 기업의 자금 부족에 그 원인이 있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투자가능 자금은 적게는 70조원, 많게는 1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해서 아직까지는 사상 유례가 없는 저금리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투자의 부진 원인을 우리 기업들이 변화하는 세계경제환경에서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취약해진 기업가 정신에서 찾기도 한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전반적인 투자 부진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오늘의 한국경제를 견인(牽引)하고 있는,글로벌 경쟁을 하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이런 지적은 적절하지 않다.

여당 지도부와의 대화에서 경제계가 내세우고 있는 요구사항,예컨대 출자 총액제의 폐지,각종 규제의 완화,이미 물 건너 간 기업인 사면 등은 그 자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투자 기피의 진정한 이유로서 내세우기에는 충분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것 같다. 이미 오래 지속된 상황으로 어제 오늘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기업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들을 드러내 놓고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핑계거리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들이 진정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만한 것들을 짐작해 본다.

'우리나라가 진정 기업할 수 있는 나라를 향해 가고 있나,이를 향해 나라의 각종 시스템이 일관성 있게 정비(整備)되고 있으며 이를 위해 국가 경영 능력이 발휘되고 있나,나라 장래의 안전보장에 대한 우려 없이 오로지 기업경영에 전념해도 될까,이런 걱정 안 하도록 정치가 제 역할만 해 준다면 경제는 우리 경제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할 텐데.'

"문제는 정치야,바보야" 경제 하는 사람들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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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백성들이 마음 편히 먹고 살게 해주는 것을 위정자들의 최고 덕목으로 여겼다.

특히 유교적 전통이 강한 동양에선 홍수,가뭄 같은 자연재해도 왕의 부덕(不德)의 소치로 여겼고 고대 중국에선 치수(治水)에 실패한 왕이 쫓겨나기도 했다.

어떤 위정자라도 나라의 경제적 기반이 튼튼하지 않은 상태에선 높은 지지를 얻기 힘들다.

경제력은 곧 국력이고,국민 생활수준이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평화,자주국방,복지,문화 같은 공약들이 제대로 자리잡기 어렵다.

실제로 중국인들이 세계적인 공산주의 정권 몰락에도 불구,중국 공산당 정부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통역 없이 서로 말이 통하게 된 것이고,더욱 중요한 것은 13억 인민들이 더 이상 굶주리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전통은 오늘날 정치인들이 입버릇처럼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칼럼에서 김인호 원장은 한국의 경제현실을 진단하면서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내세운 자극적인 구호 '문제는 경제야,바보야(It's Economy,Stupid)'에 주목한다.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은 연임을 위해 걸프전 승리,'강한 미국' 등을 치적으로 내세웠지만 당시 미국의 경제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 허점을 파고든 클린턴은 결국 대선에서 승리, 8년간 재임하며 정보화 혁신을 이루고 1980년대 일본에 밀렸던 미국 경제에 르네상스를 가져오는 등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역대 대통령이 한결같이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갈수록 성장속도가 떨어지는 조로(早老)증세를 보이고 있다.

김 원장은 기업의 투자 부진에서 이유를 찾고 있는데 왜 투자가 안 되는가에 대해선 클린턴의 선거구호를 원용해 '문제는 정치'라고 비판한다.

기업인들이 돈이 있어도 투자를 안 하는 진짜 이유를 경제를 위한다면서 실제 행동은 딴판인 정치에서 찾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미래,의심스러운 국가 경영능력,불확실한 국가 안보 등을 걱정하면서 기업인들이 과연 경영에 전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의구심이 존재하는 한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기 요원하다는 경고를 이 칼럼은 담고 있는 것이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