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사는지 … 행복이란 무엇인지 …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온다고 봄이 오는 것이 아니요,하루 아침에 여름이 되는 것도 아닌 것처럼,인간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되는 것도 하루나 짧은 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의용으로 작성한 초고를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집하여 엮은 책이다.
전체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은 '인간을 위한 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한 원리론이며 2권에서 5권은 도덕적인 덕에 관한 내용이다.
△6권은 지적인 덕 △7권은 억제와 무억제,쾌락 △8권과 9권은 우애 △10권은 쾌락과 행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폭넓은 지식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우리에게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명쾌한 논리로 해답을 제시한다.
원래 강의를 위해 작성한 글이기 때문에 각각의 개념 규정,혹은 주장에 따른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어 현실적인 상황과 연결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음이 아니어도 우리는 왜 살아가는지,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일상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아마도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 하루도 힘겹게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행복을 덕 혹은 어떤 한 가지 덕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더불어 우리의 정의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덕있는 활동은 덕에 속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세상에서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즐거운 것이요,또 이 여러 속성은 델로스에 새겨져 있는 저 잠언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고귀한 것은 가장 옳은 것이요,가장 좋은 것은 건강이라.그러나 가장 즐거운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전취(戰取)하는 것-이 모든 특성이 최선의 여러 활동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러 활동 혹은 그 중의 하나-최선의 것-를 우리는 행복이라고 보는 바이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정의를 규정하고자 하였다.
어떤 사람은 '실천적인 지혜'를 행복이라고도 하였고 혹은 '철학적 지혜'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다양한 행복의 정의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적어도 한 가지 혹은 많은 점에서 옳은 것이라는 유연한 태도로 무엇보다 행복의 정의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개념은 바로 '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 덕이란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그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행복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만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의 만족이라는 것도 강조한다.
또 '덕'이라는 본질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외모·재산·인간 관계 등 외부의 좋은 조건들이 있을 때 인간은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함으로써 일정부분 외적 조건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덕이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은 상태에 이르게 하고 또 그것의 기능을 잘 전개시켜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눈의 덕은 눈의 기능을 좋게 하는 것이다.
눈의 덕으로 해서 우리는 잘 보게 되니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의 덕이라 하는 것은 말 그 자체를 좋은 말이 되게 하며,잘 달리게 하며 말을 타는 이를 잘 운반하게 하며 또 적의 공격에 잘 대비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모든 경우에 옳다고 하며 인간의 덕도 인간을 선하게 하며 그 자신의 일을 잘 하게 하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공포나 자신이나 욕정이나 분노나 연민,그리고 일반으로 쾌락과 고통은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느낄 수 있는 것인데,그 어느 경우에나 좋은 일이 못 된다.
그러나 마땅한 때에,마땅한 일에 대해서,마땅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마땅한 동기로,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이러한 것을 느끼는 것은 중간적이며 동시에 최선의 일이요,또 이것이 덕의 특색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동에도 과도와 부족과 중간이 있다.
덕은 정의와 행동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에 있어 과도나 부족은 일종의 실패인 데 이에 반하여 중간은 칭찬받는 것이요,일종의 성공이다.
그리고 칭찬을 받고 성공한다는 것은 둘 다 덕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덕은 일종의 중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본질인 '덕'을 그 자체의 본성을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덕'을 지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지적인 덕은 교육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인 덕은 관습의 결과로 생기는데,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면 먼저 능력을 얻고 그 후에야 실천할 수 있지만 도덕적인 덕은 본성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덕'은 다시 '중용'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중용'은 '마땅함'이다.
어떠한 사안에 대해 마땅한 감정과 마땅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덕'을 실천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질투나 절도,살인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 언제나 그릇된 것이다.
그 안에서 중용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절제는 낭비라는 과도와 인색이라는 부족의 중간으로 절제 그 자체가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절제라는 덕목에 대한 중용의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용기가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무엇이 중용인지 아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의 지식으로서만 의미있는 것이라면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비켜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태도를 갖기 위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개별적인 사실에 근거할 것 △그 판단은 이성에 의할 것을 전제로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대안이 다소 추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성의 작용이 관념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천적 행위로 나타날 때 우리는 비로소 윤리의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세 가지 종류의 태도가 있다.
그 중의 둘은 악덕으로서 각각 과도와 부족에서 성립하며 다른 하나는 덕인 바,곧 중용이다.
이 세 가지 것은 어느 의미에서 제 각기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잘 하는 데서 조금밖에 엇나가지 않은 사람은 지나치는 방향으로 엇나가건 또는 부족한 방향으로 엇나가건 별로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점까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엇나가야 비난을 받을 만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추리에 의해서 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감성에 의하여 지각되는 것들은 어느 것이나 다 그런 것이다.
이런 것들은 개별적 사실에 의거하는 것이요,그 판정은 지각에 달렸다. ……만사에 있어서 중간적인 상태는 칭양(稱揚)할 일이로되,우리는 어떤 때는 과도의 쪽으로,또 어떤 때는 부족의 쪽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야 가장 쉽게 중용과 옳은 것에 나아갈 수 있겠기에 말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윤리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서양철학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 책이다.
그러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우리에게 실천 혹은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 또한 적지 않다.
또 늘 행복한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늘 불행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사소한 교훈이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박미서(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dolpul@empal.com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온다고 봄이 오는 것이 아니요,하루 아침에 여름이 되는 것도 아닌 것처럼,인간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되는 것도 하루나 짧은 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의용으로 작성한 초고를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집하여 엮은 책이다.
전체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은 '인간을 위한 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한 원리론이며 2권에서 5권은 도덕적인 덕에 관한 내용이다.
△6권은 지적인 덕 △7권은 억제와 무억제,쾌락 △8권과 9권은 우애 △10권은 쾌락과 행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폭넓은 지식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우리에게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명쾌한 논리로 해답을 제시한다.
원래 강의를 위해 작성한 글이기 때문에 각각의 개념 규정,혹은 주장에 따른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어 현실적인 상황과 연결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음이 아니어도 우리는 왜 살아가는지,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일상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아마도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 하루도 힘겹게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행복을 덕 혹은 어떤 한 가지 덕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더불어 우리의 정의는 일치한다.
왜냐하면 덕있는 활동은 덕에 속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세상에서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즐거운 것이요,또 이 여러 속성은 델로스에 새겨져 있는 저 잠언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고귀한 것은 가장 옳은 것이요,가장 좋은 것은 건강이라.그러나 가장 즐거운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전취(戰取)하는 것-이 모든 특성이 최선의 여러 활동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러 활동 혹은 그 중의 하나-최선의 것-를 우리는 행복이라고 보는 바이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정의를 규정하고자 하였다.
어떤 사람은 '실천적인 지혜'를 행복이라고도 하였고 혹은 '철학적 지혜'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다양한 행복의 정의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적어도 한 가지 혹은 많은 점에서 옳은 것이라는 유연한 태도로 무엇보다 행복의 정의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개념은 바로 '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 덕이란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그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행복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만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의 만족이라는 것도 강조한다.
또 '덕'이라는 본질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외모·재산·인간 관계 등 외부의 좋은 조건들이 있을 때 인간은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함으로써 일정부분 외적 조건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덕이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은 상태에 이르게 하고 또 그것의 기능을 잘 전개시켜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눈의 덕은 눈의 기능을 좋게 하는 것이다.
눈의 덕으로 해서 우리는 잘 보게 되니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의 덕이라 하는 것은 말 그 자체를 좋은 말이 되게 하며,잘 달리게 하며 말을 타는 이를 잘 운반하게 하며 또 적의 공격에 잘 대비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모든 경우에 옳다고 하며 인간의 덕도 인간을 선하게 하며 그 자신의 일을 잘 하게 하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공포나 자신이나 욕정이나 분노나 연민,그리고 일반으로 쾌락과 고통은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느낄 수 있는 것인데,그 어느 경우에나 좋은 일이 못 된다.
그러나 마땅한 때에,마땅한 일에 대해서,마땅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마땅한 동기로,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이러한 것을 느끼는 것은 중간적이며 동시에 최선의 일이요,또 이것이 덕의 특색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동에도 과도와 부족과 중간이 있다.
덕은 정의와 행동에 관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에 있어 과도나 부족은 일종의 실패인 데 이에 반하여 중간은 칭찬받는 것이요,일종의 성공이다.
그리고 칭찬을 받고 성공한다는 것은 둘 다 덕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덕은 일종의 중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본질인 '덕'을 그 자체의 본성을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덕'을 지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지적인 덕은 교육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인 덕은 관습의 결과로 생기는데,본성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면 먼저 능력을 얻고 그 후에야 실천할 수 있지만 도덕적인 덕은 본성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덕'은 다시 '중용'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중용'은 '마땅함'이다.
어떠한 사안에 대해 마땅한 감정과 마땅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덕'을 실천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질투나 절도,살인과 같은 것은 그 자체로 언제나 그릇된 것이다.
그 안에서 중용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절제는 낭비라는 과도와 인색이라는 부족의 중간으로 절제 그 자체가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절제라는 덕목에 대한 중용의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용기가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무엇이 중용인지 아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의 지식으로서만 의미있는 것이라면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비켜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태도를 갖기 위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개별적인 사실에 근거할 것 △그 판단은 이성에 의할 것을 전제로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대안이 다소 추상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성의 작용이 관념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천적 행위로 나타날 때 우리는 비로소 윤리의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세 가지 종류의 태도가 있다.
그 중의 둘은 악덕으로서 각각 과도와 부족에서 성립하며 다른 하나는 덕인 바,곧 중용이다.
이 세 가지 것은 어느 의미에서 제 각기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잘 하는 데서 조금밖에 엇나가지 않은 사람은 지나치는 방향으로 엇나가건 또는 부족한 방향으로 엇나가건 별로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점까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엇나가야 비난을 받을 만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추리에 의해서 쉽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감성에 의하여 지각되는 것들은 어느 것이나 다 그런 것이다.
이런 것들은 개별적 사실에 의거하는 것이요,그 판정은 지각에 달렸다. ……만사에 있어서 중간적인 상태는 칭양(稱揚)할 일이로되,우리는 어떤 때는 과도의 쪽으로,또 어떤 때는 부족의 쪽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야 가장 쉽게 중용과 옳은 것에 나아갈 수 있겠기에 말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윤리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서양철학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 책이다.
그러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우리에게 실천 혹은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 또한 적지 않다.
또 늘 행복한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늘 불행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사소한 교훈이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박미서(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dolpul@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