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 바람직한 가족관은 무엇인가

※지문 (가)의 논지를 근거로 하여 (나)와 (다)에 나타난 가족관의 차이를 밝히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가) 가정 하면 우리는 자유 행복 사랑 프라이버시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는 말도 있듯이 가정은 우리가 편안히 먹고 입고 자는 곳이다.

바깥에서 지친 우리의 심신이 마음놓고 쉴 수 있는 곳이다.

가정에서 자녀는 사랑을 받으며 양육된다.

메마르고 각박한 바깥 사회와는 달리,가정에는 부부간의 깊은 유대와 희생을 무릅쓰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흐르고 있어 우리는 정서적으로 안정을 얻으며 바깥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과 자유를 느낀다.

이런 가정은 보호되어야 할 불가침의 사생활 공간이다.

가정을 파괴하는 파렴치범은 말할 것도 없고,가정의 의미를 깎아내리거나 가족 구조를 비판하는 어떤 시도도 우리는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키워주고 보살피는 관계만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 자라버린 자녀에게 혹은 대화 상대가 아쉬운 배우자에게 키우고 보살피는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도리어 상대방을 구속하는 질곡이다.

노인들은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인들 역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살핌을 받기만 하기보다 젊은이들과 겨루고 힘을 합치며 당당히 타인으로 마주서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남편들은 대화 상대를 원한다고 말한다.

시중들어주는 대신에 부양해야 하고 사사건건 사랑을 확인하려는 아내가 아니라 독립해 있고 자기 세계를 가지며 말 건네고 싶은 아내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성장할수록 자녀 역시 키움과 보살핌의 대상이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도 언제나 감싸고 보살필 수만은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되 자신에 대해 냉정해지고 싶다.

거리를 두고 재고 자극하고 관찰하기를 원한다.

얼굴 맞댄 더할 수 없이 가까운 가족관계에서도 우리는 서로 대등한 타인이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정원,'사랑,결혼,가족''삶과 철학'에서


(나) 옛날부터 여자의 행복이라고 생각되어온 그 길이 반드시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누구나 성적 매력으로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적령기의 여자들은 대개가 다 남자를 만나게 된다.

결혼만 하면 꿈꾸었던 인생이 손에 들어온다.

멋진 남성의 '상냥하고 좋은 아내'가 된다.

여유있으면 자원봉사를 하고,자선기금도 모으며,주 1회는 미술관에도 가는 생활….이것이 무슨 부족함이 있으랴.

이런 생활을 꿈꾸고 있는 여성이 아직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재클린 오나시스나 그레이스 왕비는 아직도 여성에겐 동경의 대상인 것 같다.

그러나 낡은 사고방식에 젖은 불쌍한 아가씨여! 그 재키조차도,마흔여섯 살의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재산과 미모만이 인생의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재키는 '바이킹 프레스'의 편집자로서 예전과 같이 일의 세계로 복귀했다.

(중략)

다시 말하면,존 케네디나 레이니에 공과 같은 남성은 당신이나 나와 같이 이름도 없는 처녀와는 우선 결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결혼 대상으로 생각한 것은 여배우나 모델,그리고 대부호의 딸 등 많은 돈을 가지고 있든가,돈 많은 가족이 있는 여성이다.

더욱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여성들은 모두 아내나 어머니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귀엽고 사랑스런 전업주부라고 해서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대저택에 살며 벤츠를 몇 대나 굴리는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아내나 어머니 역할에 만족하며 멍청히 있다가는 벤츠와 함께 차고에 버려지고 만다.

내가 본 바로는 남편에게 지지 않을 만큼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여성은 버림을 받는 일이 적은 것 같다.

물론 그 중에는 버림을 받은 사람도 있고 스스로 나온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버림을 받는다 해도 그 비극을 극복하는 강인함이 있다.

돈이 있고 없음에 상관없이 남편 이외의 뭔가에 속해 있는 여성 쪽이 남성의 마음을 언제까지나 끌 수 있는 것이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요즘 남자들은 당신의 급료도 사랑하고 있는 듯하다.

―헬렌 브라운,'나는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좋다'에서


(다) 내가 고민하는 것―너무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중의 하나는 바로 가족을 일구는 일이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우리 세대가 자식을 갖는 데서 느끼는 딜레마를 털어놓았다.

자식이 우리를 얽어맨다고.자식을 낳으면 하고 싶지 않은 '어버이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말했다.

나도 약간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선생님을 보면서,내가 곧 죽을 처지인데 가족도 자식도 없다면 그 허전함을 과연 참아낼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선생님은 두 아들을 아버지처럼 사랑이 많고 남을 잘 돌봐주는 사람으로 키워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애정을 표현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원한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아버지 생애의 마지막 몇 달을 함께 지내려 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모리 선생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너희 생활을 중지하지 말아라.안 그러면 이 병이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세 사람 모두를 집어 삼켜버릴 거야."

선생님은 아들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죽어가면서조차 자식들의 세계를 존중했다.

이들 가족이 모여 있을 때는 애정이 폭포처럼 흘러났고,입맞춤과 농담이 수없이 오갔다.

그리고 침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아주고 있는 광경은 이 가족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모리 선생님은 큰아들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자식을 낳아야 되느냐 낳지 말아야 되느냐 물을 때마다,나는 어떻게 하라곤 말하지 않네.'자식을 갖는 것 같은 경험은 다시 없지요'라고만 간단하게 말해.정말 그래.그 경험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어.친구랑도 그런 경험은 할 수 없지.애인이랑도 할 수 없어.타인에 대해 완벽한 책임감을 경험하고 싶다면,그리고 사랑하는 법과 가장 깊이 서로 엮이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자식을 가져야 하네."

―미치 앨봄,'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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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논제일수록 창의적 사고력 필요

이번 논제는 현대사회에서 바람직한 가족관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가족의 문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문제기 때문에 논제를 대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논제일 것이다.

그러나 쟁점의 낯익음이 곧 논제의 평이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본 문제기 때문에 누구나 비슷한 내용을 전개할 수 있다는 맹점이 있다.

따라서 낯익은 논제일수록 제시문에 대한 분석력과 이해력,쟁점에 대한 창의적인 사고력이 중요한 평가의 요소가 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창의성이나 독창성이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우선 논제를 살펴보자.

①지문(가)의 논지를 근거로 하여 ②(나)와 (다)에 나타난 가족관의 차이를 밝히고 ③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늘 강조하는 바지만 논제 2~3줄에는 독해의 방향성과 논의의 방향성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채점의 포인트도 알 수 있는데,이번 논제의 경우 ①에서는 제시문에 대한 이해력을,②에서는 제시문에 대한 비교분석력을,③에서는 창의력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이 세 가지 능력이 이번 논제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낯익은 쟁점이라고 제시문을 대충 읽고 넘어간다면 채점의 포인트를 비껴갈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논제를 통해 각 제시문의 성격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제시문 (가)는 제시문 (나)와 (다)에 대한 독해의 방향성과 비교의 기준을 제시하는 일반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제시문 (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가족의 의미나 역할을 명확하게 파악해야만 이후 제시문을 비교 분석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또 제시문 (나)와 (다)는 제시문 (가)의 어떤 기준을 적용할 때 가족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관점의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역시 제시문 (가)를 근거로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각 제시문의 성격을 파악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가족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진술하는 것이 논지 전개의 자연스러운 순서가 될 것이다.

제시문 (가)는 가정과 가족 관계의 의미를 진술하고 있다.

메마르고 각박한 바깥 사회와 다르게 가정은 정서적인 안정과 행복,자유를 느끼는 공간이다.

그러나 가정이 양육과 보살핌의 관계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끼리 보살핌의 관계만을 고집하면 서로를 구속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가족 관계에서도 서로 대등한 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서로를 보살피는 대상이나 주체가 아니라 소통의 존재로서 가족 구성원을 대하는 것이 가정 혹은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즉 기존의 가족·가정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제시문 (나)는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데,가정이 인간의 삶을 억압할 수 있으므로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결혼은 순수한 애정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신분을 구조화하고 경제적 능력이 결혼 성립의 조건으로 작용함으로써 여성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이란 존재하기 어렵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따라서 여성이 행복한 삶을 꿈꾼다면 한 인간으로서 독립적인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제시문 (다)는 결혼을 통해 한 가정이 이루어지고,자식을 낳는 일이 한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죽음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가족은 무조건적인 행복을 제공하는 존재며 부모는 자식들의 삶을 억압하지 않고 각자의 세계를 존중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완벽한 책임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랑하는 법과 가장 깊이 서로 엮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즉 가족은 서로의 삶에 가장 깊이있게 관여하여 진정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완벽한 책임감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데 매우 이로운 구성체라고 하겠다.

제시문 (가)를 통해 우리는 기존의 가족,혹은 가정의 의미나 역할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는 문제 의식을 느끼게 된다.

전통적으로 가족은 무조건적인 희생과 사랑이 존재하는 신성불가침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과연 가족이 사회 구조로부터의 안전지대여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무조건적인 희생과 보살핌이 오히려 가족 구성원을 존재 자체로 보지 못하고,책임과 의무감으로 서로에게 인생의 짐으로 작용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가정도 하나의 사회 구성체므로 사회적 존재로서,개체적 존재로서 가족 구성원을 존중할 때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점의 가족관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제시문 (나)와 (다)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비교분석이 필요하다.

제시문 (나)와 (다)는 기존의 가족관에 대한 비판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견해를 보인다.

즉 두 제시문은 가족이 무조건적인 희생과 보살핌만을 요구하거나 수행할 경우 개인의 행복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제시문 (나)는 가족을 형성하기 위한 한 과정인 결혼이 정서적인 소통의 결과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합이 아니라 필요한 조건의 결합,물질적인 가치관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특히 결혼·가정·가족은 여성들에게 주체적인 삶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안일한 삶의 태도를 형성하거나 어머니 아내의 역할에 만족하며 살아갈 경우 기계의 부품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가족 구성원,여성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제시문 (다)는 가족을 이루는 것,특히 자식을 낳는 일이야말로 어떤 경험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며,그 경험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즉 가족이야말로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소중한 장인 것이다.

물론 제시문 (다)에서도 개인에 대한 존중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된다.

그러나 이것은 제시문 (나)에서처럼 가족 구성원 간의 분리된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들의 세계를 존중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완벽한 책임감'의 표현이다.

즉 부모가 자식을 독립적인 존재로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관계에서도 실현될 수 없는 완벽한 책임감인 것이다.

이 완벽한 책임감은 전통적인 가족관에서 말하는 무조건적인 희생과 보살핌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때의 희생은 서로에게 억압이나 의무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존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두 제시문이 가족,가정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음을 파악했다면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가족관에 대해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물론 두 제시문 중 하나의 견해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해도 되고,제3의 견해를 취해도 된다.

이번 논제의 경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시문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바탕으로 얼마만큼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가가 핵심이므로 어떤 견해를 전개하든 논리적인 설득력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다만 현대사회가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인간 소외와 같은 존재론적 위협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훨씬 더 폭넓은 견지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논술은 지금 이 자리에 대한 진단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글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미서 (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dolpul@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