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떤 수수께끼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믿는 한 그 수수께끼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중략… 여러 유형의 문화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의 삶이 단순히 되는 대로의 것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가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런 가정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전혀 이해하기가 불가능하게 보이는 관습이나 제도에 부딪치면 포기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게 된다.

…중략… 아주 기이하게 보이는 신앙들이나 관행들이라 해도 면밀히 검토해 보면 평범하고 진부하며 '통속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상황·욕구·활동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에서 밝히고 싶다.


→ 발췌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해되지 않는 다른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책이다.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 권력 관계가 형성되는 상황 속에서 다른 문화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 문화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문화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니 비난할 수 없다는 정도의 모호한 개방성이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마빈 해리스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 같은 삶의 양식도 "성(性),에너지,바람,비 등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현상들로 이뤄져 있고,그런 현상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문화의 동의할 수 없는 현상 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절대적인 잣대를 통해 문화의 우열을 따지거나 배타적이지는 않았으나 이해할 수도 없었던 다양한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구체화하기 위해 마빈 해리스는 힌두교인들의 암소 숭배,포트래취,마녀사냥 등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암소를 죽이고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는 관행은 암소숭배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암소를 죽이고 우육(牛肉)을 먹는 것을 금하는 금기가 인간의 생존과 복지에 필연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중략… 생태론적인 분석에서 정설(定說)이 되고 있는 이론은,공동체라는 유기적인 조직체는 평상의 조건들보다 오히려 극단의 조건들이 생길 때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 보통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인도의 특수조건은 정기적으로 몬순기후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살반대와 쇠고기의 식용 반대의 터부가 지니고 있는 경제적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런 터부가 한발과 기아를 정기적으로 겪어야 하는 환경 속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고찰해 보아야 한다.


근대는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효율성을 모든 사고의 중심에 두게 됐다.

그런 관점에서 힌두교인들의 암소 숭배 현상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이다.

'살이 찐 커다란 암소 옆에서 누더기 차림의 농부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 산업화된 현대 농업기술과 목축기술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암소 숭배가 '터무니없는 짓'이며,동시에 '자멸적인 짓'으로 평가할 수 있다.

혹은 생명을 중시하는 동양 정신으로 신성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마빈 해리스는 기본적으로 문화적 특성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기능적인 문화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양인들은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의 경제적·종교적 생활양식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재미있는 인상을 받았다.

그건 언제나 원주민들이 너무 미개하고 어리석고 미신에 사로잡혀 문화의 원리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런 인상이었다.

…중략… 얄리는 그런 문화의 원리들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얄리는 그 원리들을 자기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중략… 얄리는 부자가 되는 길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표준적인 유럽인들의 말이 계산된 기만이라고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상식을 갖고 있었다.

유럽인 대인들이 -원주민들에게 요구하는 자기들의 모범적 인물상과는 달리-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을 보지 않은 원주민들은 없었다.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결탁해 원주민의 문화를 평가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잣대로 작용하던 시기에 원주민들에게 문명인들은 사기꾼에 불과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원주민의 문화를 재단하고 그들의 삶의 양식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뉴기니아 마당족의 예언자 얄리는 그들의 재분배적인 교환제도와 대인제도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나를 그들의 삶의 태도를 통해 명확하게 파악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교환 방식에 의한다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서 피지배자는 지배자에게 모든 소유권을 이양해야 하며,지배자는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해 피지배자의 노동력을 싼값에 사들인다.

그러나 마당족과 같은 원주민들에게는 '부를 소유할 사람들은 그 부를 분배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포기하고 세금과 노동 강탈에 복종했던 것,또 유럽인 대인들에 대한 '존경'을 배우고 자신들에 대한 착취에 협력한 것은 바로 이런 자신들의 원칙에 유럽인 대인들이 동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대인답지 못한 대인을 만들 뿐이며,호혜적인 분배를 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회였을 뿐이다.

마빈 해리스는 마당족의 사례를 통해 자본주의가 원주민들에게 어떻게 거부당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더불어 자본주의가 절대적인 잣대로 작용할 때 얼마나 폭력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전에서 보여준 우리의 도덕적 붕괴는 우리가 하고 있던 일에 대한 객관적 의식의 과다 때문에 나타난 현상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오히려 객관적 의식을 단순히 도구에 불과한 과업들을 수행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국가적 목표들을 달성하고 정치의 실제적이고 평범한 취지를 위해 사용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우리의 애국심의 상징들과 영광에의 꿈,억누를 수 없는 자만심,제국의 환상들에 의해 우리의 의식을 신비화했기 때문에 베트남전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분위기상으로는 우리가 정확하게 반문화운동자들이 원하던 그런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는 사팔뜨기 눈의 악마들과 볼품없는 키작은 황색인들로부터 협박당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이 거룩한 위험이 있다는 환상의 노예가 되었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빈 해리스의 절대적인 세계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베트남전을 평가하는 부분에서도 계속된다.

테러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서로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다양성과 상대성이 인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는 마빈 해리스의 말처럼 '제정신이 아닌 환상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비록 신이 인간에게 서로 다른 물잔을 주었고,따라서 인간은 서로 다른 물잔으로 생명의 물을 떠 마실지도 모르지만 물을 떠 마시는 인간의 행위는 동일한 것이며 어느 잔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각자가 그 잔을 통해 어떤 마음으로 생명의 물을 떠 마시는지 끊임없이 묻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환상의 노예가 아닌 참된 생명수의 맛을 볼 수 있는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미서(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 dolpul@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