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회사의 약탈은 끝났다."

"볼리비아는 천연자원에 대해 절대적 통제권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왔다. 오늘이 그 역사적인 날이다."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지난 1일 볼리비아 내 천연가스와 석유산업을 국유화한다는 내용의 포고령을 전격 발표했다.

베네수엘라에 이은 두 번째 남미의 자원 국유화 조치다.

작년 말 대통령 선거 때부터 자원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걸긴 했지만 노동절 휴일에 급작스럽게 내놓은 선언이어서 세계 각국들은 이날 모랄레스 대통령의 한 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남부 천연가스 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안전모를 쓰고 휴대용 확성기로 연설하는 그의 모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회주의 혁명가를 다시 보는 듯했다.

볼리비아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은 왜 자원 국유화에 나선 것일까?

◆확산되는 남미의 자원 국유화

볼리비아 정부는 이날 전국의 천연가스와 유전지대에 공병대를 투입시켰다.

공장 시설 꼭대기에 국기를 높이 달아 통제권이 볼리비아 국가로 넘어왔음을 자축했다.

마치 군사 작전을 하듯 자원 관련 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볼리비아에 진출한 외국 에너지 회사들은 모든 생산품을 볼리비아 국영 에너지 기업인 YPFB로 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6개월 이내 볼리비아를 떠나야 한다.

볼리비아 정부는 대형 천연가스지대 두 곳의 지분 82%를 소유키로 했다.

이에 앞서 지난 3월 베네수엘라는 국내 유전에 대한 정부 소유 지분을 60%로 늘리는 합작 투자안을 외국 에너지회사들에 강요하는 식으로 석유 관련 기업을 국유화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석유회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베네수엘라 정부는 유전 운영권을 몰수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베네수엘라에 이은 볼리비아의 국유화 조치는 에너지를 매개로 한 중남미의 반미·좌파 경제동맹이 '말뿐이 아닌 실체'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남미에서 자원 국유화는 '유행병'처럼 퍼져 나갈 가능성이 높다.

쿠바도 곧 국내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선언할 것으로 알려졌다.

에콰도르 의회는 지난달 국제 원유시장 가격에 연동해 에콰도르 정부에 수익의 50%를 보장토록 한 에너지 개혁 법안을 가결했다.

멕시코도 오는 7월 말 치러지는 대선에서 좌파가 승리할 경우 에너지 국유화 대열에 합류할 전망이다.

◆왜 국유화인가

남미 각국의 에너지 국유화는 남미 좌파정권의 확산과 궤를 같이한다.

남미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려지는 1980년대의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뒤 미국의 지원하에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2001년 말 아르헨티나가 외환위기를 맞으며 경제파국으로 치닫자 신자유주의 모델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각종 산업의 민영화 조치가 국부를 유출시키기만 했을 뿐 정작 국민들에게는 무익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

볼리비아의 경우 농민들이 자원 국유화를 줄기차게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여러 명의 대통령을 중도하차시키기도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빈민층이 전체 인구의 64%로 줄어 들지 않는 데다 이들 대부분이 원주민이어서 사회 불만이 누적되는 상황이다. 결국 볼리비아 유권자들은 작년 12월 대선에서 핵심 산업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건 모랄레스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번 국유화 조치는 남미 국가들의 경제 실패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적 흐름인 자유시장경제와 반대의 길을 택한 이들이 국유화로 인한 비효율성을 어떻게 극복할지 관심이다.

◆미국과의 이해충돌

1990년대 이후 남미 경제는 미국 주도의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와 쿠바-베네수엘라-볼리비아 중심의 반미·좌파동맹이 대결해 왔다. 미국과 FTA를 체결한 나라는 칠레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이며 에콰도르도 현재 협상을 진행 중이다.

이에 맞서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정상들은 인민무역협정(People's Trade Agreement·PTA)을 체결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유대를 한층 강화해 나간다는 협약이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곧 치러질 멕시코 페루 니카라과 대선에서 좌파가 승리할 경우 이들은 반미·좌파동맹에 가입할 것"이라며 이 연대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것으로 관측한다.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는 중국마저 반미·좌파동맹의 배후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 맞선 연대의 중심에는 에너지가 있다.

최근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4개국 정상은 천연가스 생산국인 볼리비아에서 수입국인 파라과이와 우루과이까지 연결하는 천연가스 수송관 건설을 집중 논의했다.

이 방안이 실현되면 베네수엘라~브라질~아르헨티나 등을 잇는 길이 8000km의 초대형 가스관 건설 계획(2012년 완공 예정)과 함께 남미 각국의 에너지 연대와 남미통합시장 창출에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경제 개발에 실패한 남미 국가들이 에너지를 무기로 통합할 경우 그 파급영향이 어떻게 나타날지 세계는 주목하고 있다.

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