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프랑스 전역을 시위에 휩싸이게 만든 최초고용계약(CPE) 사태가 결국 프랑스 정부의 백기 투항으로 끝났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10일 26세 미만 직원에 대해 최초 2년간 자유 해고를 허용하는 내용의 CPE 법안을 폐기하고 청년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의미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살펴보자.

○고용 안정 선택한 프랑스

이번 사태는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가 이끄는 프랑스 우파 정부가 청년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올해 초 '쉬운 해고'를 핵심으로 하는 CPE 법안을 밀어붙이면서부터 시작됐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9.6%,청년 실업률은 22%로 유럽 주요국 중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도심 외곽 이민 2,3세대 청년들의 실업률은 최대 50%에 달한다.

빌팽 총리는 해고를 쉽게 하면 기업들이 젊은층을 더 많이 고용해 궁극적으로 청년 실업률이 낮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해고가 어렵기 때문에 신규 고용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우리는 일회용 휴지가 아니다"며 CPE 철회를 요구했다.

이 법안이 궁극적으로 26세 이상 노동자의 고용 안정까지 위협할 것으로 우려한 노동조합도 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했다.

여기에다 사회당 등 야당까지 가세하면서 하루 100만~300만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이 같은 사태 확산에 밀린 프랑스 정부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바람직한 모델 찾기는 현재 진행형

프랑스 우파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정책은 해고를 쉽게 한다는 점에서,즉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추진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개혁 또는 영·미식 모델(영국과 미국은 신자유주의가 강함)도입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맞선 시위대의 고용 안정 요구는 사회복지와 사회구성원들의 연대를 중시하는 프랑스 모델과 일맥상통한다.

이번 CPE 사태는 두 모델의 정면충돌이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번에 프랑스 모델을 선택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이 같은 선택이 '무엇이 바람직한 경제 모델이냐'는 의문에 종지부를 찍었다고는 볼 수 없다.

프랑스 모델에 대한 평가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프랑스가 실업난에 허덕이는 것은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업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럽더라도 이 같은 기득권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프랑스 모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가 '가진 자의 논리'만을 대변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이에 맞서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 체제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의 고용 안정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 정책을 함부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식도,프랑스식도 아닌 경제 모델도 물론 있다.

요즘 각광받는 덴마크 모델은 미국이나 영국처럼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동시에 높은 실업 수당과 철저한 재고용 프로그램으로 국가가 사회 보장 및 재고용을 지원하고 있다.

영·미식 자유해고와 북유럽식 복지 모델의 장점을 결합한 것이다.

덴마크는 이 같은 방식으로 1990년대 초 10% 이상이던 실업률을 5% 미만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대화와 타협은 선택 아닌 필수

프랑스 CPE 사태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또 다른 교훈은 '대화와 타협이 없는 밀어붙이기식 개혁은 국민들의 반발만 불러온다'는 것이다.

빌팽 총리는 청년 실업률을 낮춘다는 훌륭한 명분을 내걸고도 정작 청년들과는 아무런 논의도 없이 CPE를 강행했다.

여기에는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만성적인 실업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선거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빌팽 총리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게 현지 언론의 분석이다.

주용석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