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대법원 판결로 4년7개월을 끌어온 '새만금 소송'이 정부측 승리로 끝났다.
전북 군산과 김제 부안 앞바다에 총 33km 길이의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 8500만평과 담수호 3500만평을 새로 만드는 새만금 간척사업이 마침내 법원의 승인을 받았다.
이제 정부는 20년 가까이 중단과 속행을 반복해 온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간 새만금사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은 정치 리더십이 제 기능을 못하고 국책사업이 그 자체의 타당성보다 정치적 이해득실에 휘둘릴 때 사회가 얼마나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국민은 얼마나 심한 반목과 갈등을 겪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리더십 부재가 문제의 핵심
정부와 환경단체 간 새만금 소송은 1심은 환경단체의 승리로,2심과 3심은 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재미있는 것은 환경단체가 이겼을 때도,정부가 이겼을 때도 사법부는 "정치적 판결을 내렸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는 점이다.
서로 반대되는 결과를 두고 똑같이 '정치적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왔다면 문제는 판결을 내린 법관들이 아닌 다른 데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우리는 애초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사안에 대한 판단을 사법부에 맡겨놓고 사법부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사건의 2심 재판부는 "법원은 정부 정책이 법에 맞느냐 하는 문제는 판단할 수 있지만 어느 정책이 국리민복에 더 부합하는지는 결정할 권한도 능력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언뜻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에 따라 해결해야 할 문제를 왜 법원으로 가져오느냐"는 불만 어린 항변으로도 들린다.
◆호남 민심을 잡아라
새만금사업과 관련해서는 정치 지도자가 이 사업에 반대하기 힘든 미묘한 정치적 상황이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른 1987년 12월10일 전북 전주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임기 내 새만금사업 완공'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자신에게 돌팔매질까지 하는 등 크게 반발하던 호남 유권자들을 의식한 일이었다.
2조원을 들여 바다를 막고 새로운 땅을 만들어내는 대역사는 그렇게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별다른 검토나 논의 과정없이 시작됐다.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겨뤘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새만금사업 추진에 적극적이었다.
호남 지역이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김 전 대통령으로서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전북 지역의 개발사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새만금사업을 계획대로 진행한 데에도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존재와 호남 민심이 작용했다.
새만금사업을 원활히 진행하지 못할 경우 호남 지역의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속속 드러난 문제점
최초 계획에 따르면 새만금사업은 1991년부터 2004년까지 14년에 걸쳐 진행되는 대규모 사업이다.
그런데 이렇게 큰 사업을 하는 데 경제성과 타당성에 대한 치밀한 계산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서다 보니 여기저기서 허점이 드러났다.
1996년 환경단체가 새만금 간척지로 흘러드는 동진강과 만경강의 수질이 크게 악화된 사실을 밝혀냈다.
환경단체의 문제 제기가 있자 정부는 그제서야 뒤늦게 담수호 수질을 유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허점은 환경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새만금사업은 당초 식량 안보를 위해 우량 농지를 확보하자는 목적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새만금사업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1980년대 말 120kg대이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00년대 들어 80kg 수준으로 감소했다.
남아도는 쌀이 100만t이 넘고 이를 보관하는 데만 한 해 수천억원이 들어가고 있다.
사업의 목적이 유지되기 힘든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난맥상을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법원 판결을 통해 새만금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새만금사업의 남은 공사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그간 시민단체 등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로 생겨날 간척지와 담수호의 적절한 활용 방안을 제시하는 일이 정부의 과제로 남았다.
유승호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기자 usho@hankyung.com
전북 군산과 김제 부안 앞바다에 총 33km 길이의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 8500만평과 담수호 3500만평을 새로 만드는 새만금 간척사업이 마침내 법원의 승인을 받았다.
이제 정부는 20년 가까이 중단과 속행을 반복해 온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간 새만금사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은 정치 리더십이 제 기능을 못하고 국책사업이 그 자체의 타당성보다 정치적 이해득실에 휘둘릴 때 사회가 얼마나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국민은 얼마나 심한 반목과 갈등을 겪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리더십 부재가 문제의 핵심
정부와 환경단체 간 새만금 소송은 1심은 환경단체의 승리로,2심과 3심은 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재미있는 것은 환경단체가 이겼을 때도,정부가 이겼을 때도 사법부는 "정치적 판결을 내렸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는 점이다.
서로 반대되는 결과를 두고 똑같이 '정치적 판결'이라는 평가가 나왔다면 문제는 판결을 내린 법관들이 아닌 다른 데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우리는 애초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사안에 대한 판단을 사법부에 맡겨놓고 사법부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사건의 2심 재판부는 "법원은 정부 정책이 법에 맞느냐 하는 문제는 판단할 수 있지만 어느 정책이 국리민복에 더 부합하는지는 결정할 권한도 능력도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언뜻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에 따라 해결해야 할 문제를 왜 법원으로 가져오느냐"는 불만 어린 항변으로도 들린다.
◆호남 민심을 잡아라
새만금사업과 관련해서는 정치 지도자가 이 사업에 반대하기 힘든 미묘한 정치적 상황이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른 1987년 12월10일 전북 전주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임기 내 새만금사업 완공'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자신에게 돌팔매질까지 하는 등 크게 반발하던 호남 유권자들을 의식한 일이었다.
2조원을 들여 바다를 막고 새로운 땅을 만들어내는 대역사는 그렇게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별다른 검토나 논의 과정없이 시작됐다.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겨뤘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새만금사업 추진에 적극적이었다.
호남 지역이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김 전 대통령으로서는 상대적으로 낙후한 전북 지역의 개발사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새만금사업을 계획대로 진행한 데에도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존재와 호남 민심이 작용했다.
새만금사업을 원활히 진행하지 못할 경우 호남 지역의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속속 드러난 문제점
최초 계획에 따르면 새만금사업은 1991년부터 2004년까지 14년에 걸쳐 진행되는 대규모 사업이다.
그런데 이렇게 큰 사업을 하는 데 경제성과 타당성에 대한 치밀한 계산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서다 보니 여기저기서 허점이 드러났다.
1996년 환경단체가 새만금 간척지로 흘러드는 동진강과 만경강의 수질이 크게 악화된 사실을 밝혀냈다.
환경단체의 문제 제기가 있자 정부는 그제서야 뒤늦게 담수호 수질을 유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허점은 환경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새만금사업은 당초 식량 안보를 위해 우량 농지를 확보하자는 목적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새만금사업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1980년대 말 120kg대이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2000년대 들어 80kg 수준으로 감소했다.
남아도는 쌀이 100만t이 넘고 이를 보관하는 데만 한 해 수천억원이 들어가고 있다.
사업의 목적이 유지되기 힘든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난맥상을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법원 판결을 통해 새만금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새만금사업의 남은 공사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그간 시민단체 등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로 생겨날 간척지와 담수호의 적절한 활용 방안을 제시하는 일이 정부의 과제로 남았다.
유승호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