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고전읽기]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주인을 자유로이 선출한다는 것은 주인이나 노예를 폐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속에서 자유 선택은 이들 상품과 서비스가 고통과 공포의 생활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지속시키는 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이론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일원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마르크스에 대한 재해석과 하이데거,프로이트의 영향을 바탕으로 '고상해진 노예들'의 사유 체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고 있는데,그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일차원적 인간'이다.


'일차원적 인간'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과 자유가 진정한 행복과 자유인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일상은 선택의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어떤 옷을 입을까부터 시작해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어느 회사의 자동차를 구매할 것인지,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등 작은 일상에서부터 인간의 삶 전체는 선택의 연속이다.


물론 우리는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다. 즉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나의 선택에 대한 독립성을 보장받고,그러한 자유로운 선택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마르쿠제는 이러한 우리의 선택에 대해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었는가,진정 주체적인 선택이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선진 산업사회의 현저한 특징은 해방을 추구하는 욕구를 효과적으로 질식시키면서 동시에 풍요한 사회의 파괴적인 힘과 억압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허용한다는 점에 있다. 이 사회에는 낭비물의 생산과 소비를 요구하는 압도적으로 강한 욕구,노동이 더 이상 실제로는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도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일하려는 욕구,이 마비를 경감하고 지연시키는 갖가지 기분전환을 추구하는 욕구,이를테면 관리가격에 의한 자유경쟁,자율로 검열하는 자유 언론,상표와 상업광고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보여지는 기만적인 자유를 유지하고 싶다는 욕구 등이 사회 통제에 의해 강요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력은 엄청난 생산력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의 생산력은 효율성을 바탕으로 한 기술화,관료화를 구조화함으로써 사회를 일차원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며,그 구성원의 사유 역시 일차원적인 사유에 머물게 한다. 마르쿠제에게 있어 일차원성이란 구성원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인간에 대하여 내면적인 모순을 느끼지 못하고 현재의 상태를 비판없이 수용하는 태도다. 직업을 선택할 때 우리는 나의 행복을 위해,자아 실현을 위해 직업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업 안에서,직장인으로서의 나의 삶은 열심히 일하거나 회사를 그만 두고 굶어 죽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된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것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는 강제적인 선택에 불과하다. 그러한 현상이 구조화되면서 우리는 회사의 발전을 위해 나의 전부를 바치게 된다.


따라서 회사의 운영 방침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거나 회사가 나의 삶을 어떻게 침해하고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더불어 '열심히 일한 자'만이 떠날 수 있는 휴가를 받았을 때 간만에 누리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우리에게 휴가라고 하는 것은 행복을 가장한 불행임에도 불구하고,간만의 휴식을 위해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워크홀릭이 되어 간다. 일차원적인 사회는 '풍요와 자유를 가장해 사적 및 공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진지한 반대를 통합하고 모든 선택 가능성을 흡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에게 현실의 너머를 추구하고,현실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이차원적인 사유를 기대할 수 없음은 당연할 것이다.



"1차원적 사유는 정치제조자와 정보의 조달업자에 의해 체계적으로 조장된다. 그들의 진술 세계는 끊임없이 그리고 독점적으로 반복되어 최면적인 정의 또는 지시가 되는 자기확인적 가설로 구성된다.


'사유의 습관'으로 광범하게 실행된 조작적·행동적 시점은 진술과 행동,욕구와 소망의 기성 세계적 관점으로 돼버린다. '간교한 이성(cunning of reason)'은 흔히 그랬던 것처럼 현존권력을 위해서 활동한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이 예술·정치·종교·철학을 상업과 조화스럽게,때로는 무의식적으로 함께 뒤섞으면 그들은 이들 문화영역을 상품형태란 공통분모로 끌고 간다. 솔 뮤직(the music of the soul) 역시 외판원의 음악이 된다.


고려되는 것은 진실의 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다. 현상유지의 합리성이 이리로 집중되고,모든 이질적 합리성은 그것에 굴복하게 된다. 자유와 완성이란 위대한 어휘들이 영화·라디오·무대에서 선거운동하는 지도자와 정치가들에 의해 발언될 때,그 어휘들은 선전·상업·수양·휴식의 문맥에서만 의미를 얻는 무의미한 음향으로 변해버린다.


이처럼 현실과 이상이 유사하게 된다는 것은 이상의 위축된 정도를 입증한다. 그것은 정신·영혼 또는 내적 인간의 승화된 영역으로부터 끌어내려져서 전략적인 용어와 문제로 변형한 것이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누리꾼의 집단적인 의사 표현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인터넷의 활성화가 대중의 의사 표현에 대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으나 마르쿠제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거짓된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상에서 마녀사냥과 같은 폭력적이고 유행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하는 일에 대해 개인은 자신도 그에 동의한다는 '자기 확인적 가설'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자율적이지 못하다. 광고주가 전달하는 언어를 통해 이야기하고,복제화된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대중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삶의 양식을 따라가기 위해 자신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거짓된 욕구란 개인을 억압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 특정의 사회적 세력이 개인에 대하여 부과하는 욕구'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거짓된 욕구'로부터 벗어나 '진실한 욕구'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의 억압적 관리가 합리적·생산적·기술적 및 전체적으로 되면 그럴수록 관리되고 있는 개인들이 그 노예상태를 타파하고 자기 해방을 달성하는 수단과 방법은 갈수록 상상하기 곤란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태도가 필요한 것일까?


"모든 해방은 노예상태를 자각하는 데 기초하고 있고,이 자각의 발생은 어느 경우에나 이미 그 대부분이 개인 자신의 것이 돼버린 욕구와 만족의 지배적인 힘이 우세하기 때문에 방해를 당한다. 해방의 프로세스는 어떤 경우에나 선행하는 조건의 시스템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그 최고의 목표는 허위의 욕구를 진실의 욕구로 바꾸는 것이며,억압적인 만족을 폐기하는 데 있다."


혁명은 기존의 억압적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욕망의 표출이 있을 때 혁명의 축제는 시작되는 것이다. 마르쿠제 역시 일차원적인 사유 체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주체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존 체제의 욕망을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르쿠제가 학생 지식인 여성 등과 같은 국외자 집단에게서 희망을 보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미래가 열려있을 때,현재는 우리 삶의 터전이 된다. 기존의 욕망적 체제라는 안정적인 영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나의 욕망을 찾아갈 때 우리에게 미래는 희망적일 수 있을 것이다.


박미서 (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 dolpul@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