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흥망과 생사는 궁극적으로 기업가의 사람됨에 달려 있습니다.
이윤 추구에 목표를 두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바른 길을 가겠다는 신념과 철학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74)은 '윤리 경영의 선구자'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27세에 단돈 300만엔으로 창업해 지난해 은퇴하기까지 교세라를 세계적인 하이테크 기업으로 키워 놓은 그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마쓰시타 전기그룹 창업자),혼다 소이치로(혼다자동차 창업자)와 함께 '일본의 3대 기업가'로 꼽힌다.
그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고(故) 우장춘 박사의 사위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불행을 딛고 일본 벤처기업의 대부로
이나모리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32년 규슈 남단 가고시마현의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실패한 뒤 결핵까지 걸렸다.
그는 대학입시도 1차에선 실패하고 2차로 지방대에 합격했다.
대학 때에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불황기라 취직은 힘들기만 했다.
그는 "나는 뭘 해도 안 된다"는 자학에 시달렸다.
한때 '인텔리 야쿠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결국 가까스로 취직한 곳은 가족 간 경영권 다툼만 벌이고 월급도 제때 안 주는 작은 회사였다.
입사 동기들은 하나 둘 떠났고 나중엔 그만 남았다.
그때 결핵을 앓았을 때 읽었던 책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 마음 속에는 재난을 끌어들이는 자석이 있다.
병에 걸리는 것은 병을 끌어들이는 약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미친 듯 연구에 몰두했고 최첨단 세라믹 제조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9년 교세라의 전신인 교토세라믹을 세운다.
남의 창고를 빌려 설립한 이 회사는 당시 자본금 300만엔,종업원 28명에 불과한 벤처기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기술력과 끈기 있는 도전으로 승부를 걸었다.
결국 교세라를 전 세계 세라믹 시장의 70%를 장악한 우량회사로 키워냈다.
그는 또 통신 디지털부품 휴대전화 카메라 반도체 부품 등의 사업에 진출해 오늘의 교세라그룹을 완성했다.
교세라는 현재 매출 11조8000억엔,순이익 459억엔(2005년 3월 기준)에 전 세계 160여개의 자회사와 6만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2차세계대전 이전의 재벌과 달리 맨주먹으로 대기업을 일궜다는 점에서 '일본 벤처업계의 대부'로 통한다.
◆철학이 있는 경영자
하지만 그는 성공한 뒤에도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리경영'과 '정도경영'을 강조했다.
기업이 장수하려면 재주보다 인격을 갖춘 최고경영자(CEO)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돈을 버는 데도 원칙이 있었다.
'땀 흘리며 스스로 번 돈이 진짜 이익'이라는 것.일본 기업이 너나 할 것 없이 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돼 있던 거품경제 시절에도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그 유혹을 단칼에 거절했다.
땅으로 돈을 버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 이익은 헛된 성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기업가는 종업원들의 행복 추구와 인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념을 제시했다.
그가 자신의 좌우명과 교세라의 사시를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 자신도 윤리경영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46년간 쌓은 퇴직금을 모교인 가고시마대학 등에 모두 기부하고 탁발승의 길로 들어섰다.
1997년부터 다이와(大和)라는 법명과 함께 승적을 보유한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나는 재물을 쓰는 데도 올바른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술 진흥과 문화사업 지원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84년 주식과 현금 등 사재 200억엔을 출연해 이나모리재단을 설립,교토상을 제정했다.
최근 타계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1998년 아시아인 가운데 최초로 이 상을 수상했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의 명성은 해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경영 철학을 전수하기 위해 1980년 결성한 연구모임인 '세이와주쿠'(盛和塾)는 현재 전 세계 50여개 지역에 설치돼 있다.
지금도 이곳에는 그의 경영 이념과 철학을 본받으려는 젊은 경영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주용석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hohoboy@hankyung.com
이윤 추구에 목표를 두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바른 길을 가겠다는 신념과 철학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74)은 '윤리 경영의 선구자'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27세에 단돈 300만엔으로 창업해 지난해 은퇴하기까지 교세라를 세계적인 하이테크 기업으로 키워 놓은 그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마쓰시타 전기그룹 창업자),혼다 소이치로(혼다자동차 창업자)와 함께 '일본의 3대 기업가'로 꼽힌다.
그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고(故) 우장춘 박사의 사위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불행을 딛고 일본 벤처기업의 대부로
이나모리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32년 규슈 남단 가고시마현의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실패한 뒤 결핵까지 걸렸다.
그는 대학입시도 1차에선 실패하고 2차로 지방대에 합격했다.
대학 때에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불황기라 취직은 힘들기만 했다.
그는 "나는 뭘 해도 안 된다"는 자학에 시달렸다.
한때 '인텔리 야쿠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결국 가까스로 취직한 곳은 가족 간 경영권 다툼만 벌이고 월급도 제때 안 주는 작은 회사였다.
입사 동기들은 하나 둘 떠났고 나중엔 그만 남았다.
그때 결핵을 앓았을 때 읽었던 책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 마음 속에는 재난을 끌어들이는 자석이 있다.
병에 걸리는 것은 병을 끌어들이는 약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미친 듯 연구에 몰두했고 최첨단 세라믹 제조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1959년 교세라의 전신인 교토세라믹을 세운다.
남의 창고를 빌려 설립한 이 회사는 당시 자본금 300만엔,종업원 28명에 불과한 벤처기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로지 기술력과 끈기 있는 도전으로 승부를 걸었다.
결국 교세라를 전 세계 세라믹 시장의 70%를 장악한 우량회사로 키워냈다.
그는 또 통신 디지털부품 휴대전화 카메라 반도체 부품 등의 사업에 진출해 오늘의 교세라그룹을 완성했다.
교세라는 현재 매출 11조8000억엔,순이익 459억엔(2005년 3월 기준)에 전 세계 160여개의 자회사와 6만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2차세계대전 이전의 재벌과 달리 맨주먹으로 대기업을 일궜다는 점에서 '일본 벤처업계의 대부'로 통한다.
◆철학이 있는 경영자
하지만 그는 성공한 뒤에도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리경영'과 '정도경영'을 강조했다.
기업이 장수하려면 재주보다 인격을 갖춘 최고경영자(CEO)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돈을 버는 데도 원칙이 있었다.
'땀 흘리며 스스로 번 돈이 진짜 이익'이라는 것.일본 기업이 너나 할 것 없이 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돼 있던 거품경제 시절에도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그 유혹을 단칼에 거절했다.
땅으로 돈을 버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 이익은 헛된 성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기업가는 종업원들의 행복 추구와 인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념을 제시했다.
그가 자신의 좌우명과 교세라의 사시를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 자신도 윤리경영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46년간 쌓은 퇴직금을 모교인 가고시마대학 등에 모두 기부하고 탁발승의 길로 들어섰다.
1997년부터 다이와(大和)라는 법명과 함께 승적을 보유한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나는 재물을 쓰는 데도 올바른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술 진흥과 문화사업 지원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84년 주식과 현금 등 사재 200억엔을 출연해 이나모리재단을 설립,교토상을 제정했다.
최근 타계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1998년 아시아인 가운데 최초로 이 상을 수상했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의 명성은 해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경영 철학을 전수하기 위해 1980년 결성한 연구모임인 '세이와주쿠'(盛和塾)는 현재 전 세계 50여개 지역에 설치돼 있다.
지금도 이곳에는 그의 경영 이념과 철학을 본받으려는 젊은 경영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주용석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