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제시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라

[가]

인간이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다.

즉 거기에는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들이 포함돼 있다.

자기란 단순한 관계가 아니고,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바를 의미한다.

인간은 유한성과 무한성, 시간성과 영원성,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이란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인간은 아직 아무런 자기가 아니다.

양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관계 그 자체는 '부정적 통일'로서의 제삼자이다.

그들 양자는 관계에 대해 관계하는 것이며,그것도 관계 속에서 관계에 대해 관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영혼이라고 할 경우,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그와 같은 관계이다.

이에 반해 관계가 그 자신에 대해 관계한다면,이 관계야말로 적극적인 제삼자인 것이며,그리고 이것이 자기인 것이다.

(註:여기서 부정적 통일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으로서의 종합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그와 같은 관계는 자기를 스스로 정립한 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정립된 것이거나 이 둘 중 하나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가 다른 사람에 의해 정립될 경우,물론 그 관계는 제삼자인 셈이지만 그러나 그 관계,즉 제삼자는 다시 또 모든 관계를 정립한 것과 관계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도출되어 정립된 관계가 바로 인간인 자기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이요,동시에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처럼 그렇게 타자와 관계하는 관계이다.

(키에르케고르,'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나]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따라서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의 이중성에 따라서 이중적이다.

근원어는 낱개의 말이 아니고 짝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나-너'라는 짝말이다.

또 하나의 근원어는 '나-그것'이라는 짝말이다.

(…중략…)

'나',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 '나-너'의 '나'와 근원어 '나-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그는 그 둘 중의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그가 생각하고 있는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또한 그가 '너' 또는 '그것'이라고 말할 때 위의 두 근원어 중 어느 하나의 '나'가 거기에 존재한다.

(…중략…)

정신이 독자적 삶 속에 작용해 들어가는 것은 결코 정신 자체가 아니며,'그것'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에 의한 것이다.

정신이 자기에게 열려 있는 세계를 향하여 마주 나아가 그 세계에 자기를 바쳐서 세계와 그 세계에 속하여 자기를 구원할 수 있을 때,정신은 참으로 '자기 자신'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 산만하고 약화되고 변질되고 철저하게 모순에 빠진 지성이 다시 정신의 본질,곧 '너'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것'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무제한으로 지배하고 있다.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모든 '물리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또한 자기 경험 안에서 이미 발견되었거나 또는 발견되는 모든 '심리적'인 사건도 필연적으로 인과의 계율로 간주된다.

그 중에서 어떤 목적 설정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사건들까지도 역시 '그것'의 세계에 연속체를 이루는 일부로서 인과율의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중략…)

인과율이 '그것'의 세계에서 무한정한 지배력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의 과학적 질서를 위해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억압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그것'의 세계에만 속박되어 있지 않고,거기에서 벗어나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관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의 세계에서 '나'와 '너'는 서로 자유롭게 마주 서 있으며,어떠한 인과율에도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은 상호관계에 들어선다.

이 관계의 세계 속에서 사람은 자기의 존재 및 보편적 존재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관계를 알며 '너'의 현존을 아는 사람만이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결단하는 사람만이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는 '너'의 면전에 나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관계의 목적은 관계 자체,곧 '너'와의 접촉이다.

왜냐하면 '너'와의 접촉에 의하여 '너'의 숨결,곧 영원한 삶의 입김이 우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 서 있는 사람은 현실에 관여한다.

즉 그는 존재에 그저 맞닿아 있는 것도 아니고,존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존재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현실은 하나의 작용이다.

나는 그것을 내 소유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 작용에 관여하고 있다.

관여가 없는 곳에는 현실이 없다.

자기 독점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현실이 없다.

관여는 직접적으로 '너'와 접촉하는 것이며,그럴수록 그만큼 더 완전하다.

(마루틴 부버,'나와 너'에서)


[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두 마리 개를 그린 유명한 만화가 있다.

한 마리가 자판을 두들기며 다른 개에게 말한다.

"인터넷에서는 우리가 개라는 걸 아무도 모를 거야." 여기에 이런 말도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거야."

뉴욕에서 도쿄까지는 대략 14시간이 걸린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40~50개에 달하는 전자 우편물을 작성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내가 호텔에 도착해서 관리인에게 이것을 팩시밀리로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을 그려 보라.그 정도 양이면 단체 우편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전자우편으로 이것을 보내면 아주 빠르고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특정 장소가 아니라 특정인에게 보낸다.

사람들은 도쿄가 아니라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전자우편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누구나 당신에게 우편물을 보낼 수 있는 이동성을 제공한다.

전자우편은 여행 중인 세일즈맨에게 아주 적합하다.

그런데 전자우편과 항상 접속되어 있도록 하는 과정은 디지털 생활에서 비트와 아톰 간의 차이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중략…)

거기서 나는 여러 개의 이름으로 인터넷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인터넷과 접속하는 것은 마술이다.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디지털이다'에서)


[라]

지난 27일 프랑스 의료진은 세계 최초로 안면 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이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수술 받은 여성이 24시간 뒤에 서서히 의식을 회복했다"면서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감사해요'라는 첫 마디를 던졌다"고 전했다.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올해 38세의 이 여성은 지난 5월 개에게 물려 코와 입술을 잃어 제대로 말을 하거나 음식물을 씹을 수가 없는 상태여서 뇌사 상태의 여성으로부터 기증받은 피부 조직과 근육,동맥,정맥을 이식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코와 입술,턱 부분이 이식된 이번 수술은 세계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고,수술 집도의는 프랑스 남동부 리옹 소재 병원의 전문의인 장-미셸 뒤베르나르와 아미앵대학병원의 전문의 베르나르 드보셸이었다.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 성공을 거둔 이번 안면 이식 수술은 화상이나 사고로 얼굴이 망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 주었지만,이 수술로 다른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할 수 있어 본인이나 가족,주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는 논란도 있었다.

(리옹 AP/연합뉴스에서)


※ 앞의 제시문 [가], [나]와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라.

-----------------------------------------------------------------------

[문항1]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한 현대 사회의 특징적인 두 단면을 제시한 [다], [라]는 보여준다.

제시문 [가], [나]의 논지를 요약한 후, 이를 구체적 논거로 활용하여 [다], [라]가 시사하는 문제점 중 공통점을 중심으로 논술하라. (800~900자)

-----------------------------------------------------------------------

[마]

약 한 세기 전의 한국,이 무렵 나라 곳곳에선 한센병 환자들이 상당히 늘어나 사회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후일 정부 당국에서는 한 낙도에 한센병 환자들의 전문치료병원을 건립하고,모든 육지의 환자들을 그 섬 안에다 강제 수용시킨다.

그러자 섬에서는 환자들의 탈출극이 빈발한다.

목숨을 걸고 섬을 탈출해 나가는 환자들이 그치질 않는다.

이럴 무렵 능력 있는 의사가 병원의 새 원장으로 부임해 온다.

그리고 거의 절대에 가까운 통치권으로 이 섬과 섬의 환자들을 관리하고 지배해 나간다.

그는 우선 환자들의 탈출을 막는 데에 전력을 기울인다.

탈출 사고가 빈발하는 이유가 그에게는 너무도 명백하다.

그는 섬 안에 환자들의 낙원을 꾸미기를 희망한다.

환자들의 병을 잘 치료해주고,주거환경을 개선하고,복지시설을 늘리고,노동량을 줄여주며,신앙의 자유와 가족 단위의 생활 대책을 확보해 준다.

그런 식으로 그는 그 스스로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환자들의 낙원을 꾸며 놓는다.

하지만 그래도 환자들의 탈출극은 그치지 않는다.

계속되는 탈출 사건은 원장이 꾸미려는 섬의 낙원에 대한 노골적인 야유이자 부정의 시위인 것이었다.

원장과 환자들 사이의 싸움은 끝없이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원장은 깨닫는다.

(이청준,'말없음표의 속말들'에서)

----------------------------------------------------------------------

[문항2] 제시문 [가], [나]의 논거를 구체적으로 활용하여, 제시문 [마]에서 원장이 깨달은 바의 핵심 내용을 추론하라. (500~600자)

----------------------------------------------------------------------

주어진 논제는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에 따른 인간의 정체성 상실과 그에 따른 우리의 태도를 묻고 있다. 두 개의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각각의 완결된 논술문을 연결하면 또 하나의 논술문이 된다.


첫 번째 문항을 보자. ①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②이와 관련한 현대 사회의 특징적인 두 단면을 제시문 [다] [라]는 보여준다. ③제시문 [가] [나]의 논지를 요약한 후,이를 구체적 논거로 활용하여 ④[다] [라]가 시사하는 문제점 중 공통점을 중심으로 논술하라.


첫 번째 문항은 친절하게도 논의를 위한 대전제(①)와 제시문에 대한 독해 방향(②),논의 전개의 방향(③ ④)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논제처럼 독해의 방향은 물론이고 논의의 전개 방향까지 제시하는 경우,채점의 방향 역시 이러한 순차적인 문제 해결 과정이 중심이 될 것이다. 논제의 요구사항을 충실하게 이행해 감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①의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논의의 핵심은 인간의 실존적 상황 변화다. 그러므로 각각의 제시문을 인간의 실존적 상황 변화라는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시문 (가)는 인간이란 관계에 의해 그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이며,동시에 타자와 관계하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제시문 (나)도 '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제시문 (가)보다 그 의미를 구체화하고 있다. 제시문 (나)에 의하면 인간은 '나'와 '너',혹은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과의 관계가 인과율에 의해 지배받는다면 '너'와의 관계는 관계 그 자체가 목적이 됨으로써 자기의 존재,보편적 존재의 자유가 보장돼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인간은 현실 속에 존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실은 본질적 존재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시문 (다)는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이 인간에게 자유로움을 제공하고 있지만,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수도 있음을 문제 제기한다. 즉 인터넷을 사용하는 두 마리의 개가 주고받는 대화처럼 가상 공간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된다.

제시문 (라)는 세계 최초로 안면 이식 수술에 성공했다는 신문 기사를 통해 이러한 의료 기술의 발전이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동시에 다른 사람의 얼굴 모양을 갖게 됨으로써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제시문 (가)와 (나)는 인간이란 자신 혹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관계의 목적은 어떤 인과율에 지배받지 않는 '관계' 그 자체에 있으며,이러한 관계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시문 (다)와 (라)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간에게 새로운 의미의 자유를 제공한 듯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인간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문제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제시문 (다)와 (라)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인간의 정체성 상실과 관련해 제시문 (가)와 (나)는 그 원인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이 그 존재적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인간은 존재 자체로서의 기쁨이 아닌 도구적인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가상 공간에서는 무한한 접속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은 찾아볼 수 없다. 가상 공간은 더 이상 인간의 공간이 아닌 것이다. 단지 기계적인 접속을 행하는 기계로서의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시문 (다)에서 제기하고 있는 '디지털 생활에서 비트와 아톰 간의 차이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문 (나)에서 찾을 수 있다.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디지털이다'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아톰(Atoms:원자)은 현실을,비트(bits)는 가상 공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알프스의 빙하수가 대서양을 건너 우리 앞에 놓인 에비앙 생수가 아톰이라면 영국의 파운드 화는 비트다. 에비앙 생수 한 병이 고객의 손에 오기까지는 수 많은 사람의 수고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현실의 공간에서는 '너'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끊임없이 서로의 삶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스위치 조작으로 '아바타'를 사고 파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는 삶의 개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제시문 (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여러 개의 이름으로 인터넷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제시문 (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새로운 얼굴을 제공해 새로운 삶을 열어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안면 이식 수술의 성공은 그동안 자신이 맺어온 사람들과 전혀 다른 얼굴로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그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디지털 시대를 거슬러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인간의 삶을 점유하고,그 결과 인간의 본질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끊임없이 요구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논의를 전개한다면 설득력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문항을 보자. ①제시문 [가] [나]의 논거를 구체적으로 활용하여,②제시문 [마]에서 원장이 깨달은 바의 핵심 내용을 추론하라.


제시문 (마)의 내용을 살펴보면 병원장은 탈출을 시도하는 환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낙원을 건설해 주는 것으로 탈출을 막고자 하지만 환자들은 여전히 탈출을 그치지 않았고,이를 통해 병원장은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한센병 환자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병원장은 객관적으로 만족할 만한 환자들의 낙원을 꾸며 놓지만,환자들에게 그 섬은 낙원이 되지 못한다. 왜 병원장이 만든 섬의 환경이 그들에게 낙원이 되지 않았을까? 아마도 ②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첫 번째 문항을 해결하기 위해 살펴 보았던 것처럼 제시문 (가)와 (나)에서는 인간이란 관계를 통해서만이 실존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제시문 (나)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그 관계란 관계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며,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를 도구가 아닌 존재 그 자체로서 대할 때 서로의 존재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데 병원장은 이러한 관계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을 하나의 도구로 이해하고,그들에게 객관적인 조건을 제공하는 것만을 염두에 둔 것이다.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환자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도구적인 인간 관계를 극복하지 못했고,그 결과 병원장의 낙원은 환자들의 낙원이 되지 못했다. 행복한 사회란 객관적인 조건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그 구성원 간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그러한 관계만이 구성원에 대한 사회의 억압적 기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인간 관계의 본질,나아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논의할 수 있다면 무난한 답안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박미서 (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 dolpul@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