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니'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상대한테 투자한 만큼(그것이 물질이든 감정이든 관계없다) 상대는 그 결과물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실망,혹은 배신이라는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상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한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의 대부분은 존재 자체가 아닌 좀더 유용한 거래를 위한 수단이다.
좀더 훌륭한 몸매를 위한 다이어트가 성행하고,좀더 매력적인 얼굴을 만들기 위한 성형 열풍이 불고,좀더 좋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학벌주의가 만연해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관계 맺기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모든 관계의 거래를 전제로 한다.
만드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고,고용하는 사람과 고용되는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인간과 신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시디즘에 기반을 둔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는 관계 맺기에 대한 실존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하시디즘은 성·속(聖·俗)일치의 경건주의 운동을 말한다)
"'나' 그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근원어 '나-너'의 '나'이거나 근원어 '나-그것'의 '나'일 뿐이다.
'나'라고 말할 때 사람은 '나-너'의 '나'이거나 '나-그것'의 '나'이거나 그 둘 중의 어느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가 '나'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이 두 '나' 가운데 어느 한 '나'가 존재하고 있다.
그가 '너' 또는 '그것'이라고 말할 때는,두 근원어 가운데서 이에 알맞은 '나'가 거기 존재하고 있다."
부버에게 '나' 혹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가 아니다.
어떠한 방식이든 관계 맺음을 통해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인식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기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자연과 맺어온 관계 맺기의 방식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그 자체로 정의 내리거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 속에서 인간은 존재하는 것이다.
부버는 아포리즘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저서 '나와 너'에서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나'와 '너'라는 본질적인 것과 '나'와 '그것'이라는 수단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세계를 대하는 서로 다른 속셈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에 대해 '너' 혹은 '그것'이라는 두 가지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익숙해 있는 우리는 '너'가 아닌 '그것'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하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것이 '너'인가,'그것'인가는 결국 내가 맺고 있는 관계가 본질적인 것인가 수단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이 아닌 '너'로서 맺어야 하는 관계는 어떤 것일까?
부버는 세 가지 관계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관계의 세계가 펼쳐지는 영역이 셋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공동 생활이다.
여기에서는 관계가 어둠 속을 헤매기만 하고,말을 통해 표현되지는 않는다.
생물이 우리와 마주 서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다가오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너''여!' 하고 말을 건네어 보더라도 그 소리는 입 속을 맴돌기만 할 뿐,말이 되어 튀어나가지를 않는다.
둘째는 사람과의 공동 생활이다.
여기에서는 관계의 세계가 열려있고,뚜렷한 말의 꼴을 띠고 있다.
비로소 우리는 이 세계를 '너'라고 부를 수도 있고,또 '너'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셋째는 정신적 실재와의 공동 생활이다.
여기에서는 관계가 구름에 덮여 있기는 하지만,스스로를 알려주고 있다.
말은 쓰여지지 않으나 말에 해당하는 상황이 빚어지고는 있다.
'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지각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부르고 있음을 느끼고,마침내는 이에 응답하게 되는 것이니,형성하고 사고하고 행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응답인 것이다.
비록 여기서 우리가 입으로 '너''여!' 하고 응답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들의 존재 바로 그것으로써 근원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권리가 있기에 말의 권외에 서 있는 것들을 굳이 끌어들여 근원어의 세계와 관계를 맺어 주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는 저마다의 길을 달리고 있는 이 세 영역 하나하나에서,우리들에게 제시되는 온갖 것의 생성 과정을 통해서,'영원자 너'의 옷깃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영역에서 '영원자 너'의 숨결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그 하나하나의 '너'를 통해 영원의 '너'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부버에게 이 세 가지 관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자연과 사람과 정신적 실재와의 공동 생활은 그 관계 맺음 자체로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하나의 관계 맺음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부버에게 현재란 '우리들의 사고 안에서 이 때로부터 저 때로 옮겨 가면서 차례차례로 완결해 가는 점을 가리키거나 또는 일정한 종착을 지향하는 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충실한 현재,진정한 현재라는 것은 그 안에 현존성과 만남의 관계가 실제로 나타날 때만 이룩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버는 우리에게 전면적인 소통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나-너'의 근원어는 오직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나의 전 존재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그 안에서 무르녹는 것은 나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없이도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버젓한 '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 됨에 따라 나는 그를 '너'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온갖 참된 삶은 만남이다.
'너'와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어떠한 관념 형태도,어떠한 공상도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회상조차도,단편적인 상태에서 전체적 통일로 진전함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게 된다.
'나'와 '너' 사이에는 어떠한 의도도,어떠한 욕망도,어떠한 예측도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갈망마저도 꿈에서 현실로 옮겨질 때는 그 모습이 변하고야 마는 것이다.
모든 수단이 다 장애일 뿐이다. 진실로 이 모든 것이 무너질 때에 비로소 '나'와 '너'의 만남이 실현되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우리는 전면적인 소통이 아닌 단순히 상대에 대한 정보를 통해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상대가 나의 삶에 개입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가 일정의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전면적인 소통이 아닌 배려가 전제되는 관계가 우리의 관계 맺기 방식인 것이다.
사생활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타자의 삶에 관여해야 할 부분과 관여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분리한다.
결국 이러한 배려는 타자와의 소외적 공간을 만들게 된다.
부버는 이러한 관계 맺기에 문제를 제기한다.
'너'에 대해 무엇을 경험할 수 있으며,무엇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냐고….
그가 '너'에 대해서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야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상대에 대한 배려나 정보를 통한 소통이 아닌 삶 전체에 대한 전면적 소통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떠한 매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그러한 만남이 가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박미서 (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 dolpul@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