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다룬 '해밀턴의 가격혁명' 주장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반론은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 금과 은의 양이 과장됐다"는 것이다.

귀금속의 유입과 유출을 동시에 고려했어야 하는데 유출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은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 등을 아시아 지역에서 사들였다.

따라서 많은 귀금속이 유출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반론을 제기하는 사학자들은 스페인이 남미를 비롯한 미주대륙에서 들여온 귀금속의 규모와 물가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유럽 내에서 증대된 귀금속의 규모와 물가 사이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500년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에 어느 정도의 귀금속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국 증대된 금과 은의 규모가 기존의 귀금속 규모에 비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없고,따라서 이렇게 증대된 금은이 3.5배에 달하는 물가상승을 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최근에는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16세기 초 유럽에 존재했던 금과 은의 규모를 추정하고자 하는 방법이 제시되기도 했다.

금과 은 사이의 교환비율이 희소성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시중에 존재하는 금과 은의 양이 바로 그 비율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즉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금 1g에 은 15g이라면 이는 존재하는 금과 은의 규모가 1 대 15인 것을 반영한 것일 거라는 말이다.

1500년 당시 금과 은의 가격비율(양으로서의 교환비율의 반대)은 10.5 대 1이었고,1660년 당시 가격비율은 14.5 대 1이었다.

이 기간 중 유럽으로 유입된 금과 은이 각각 181.3t과 16886.8t이었다.

1500년 당시 존재했던 금의 양을 x,은의 양을 y로 하면 10.5x=y,14.5(x+181.3)=y+16886.8이라는 연립방정식을 세울 수 있다.

이 식으로부터 1500년 당시 유럽에 존재했던 금은 약 3565t,은은 37427t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존에 존재했던 금과 은에 비해 한세기 반 동안 유입된 금과 은의 규모는 그렇게 큰 폭의 물가상승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어 보인다.

결국 우리는 앞에서 보여주었던 화폐수량설의 방정식을 다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즉 M의 증가가 P의 증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면 Q가 감소했거나,혹은 M과 함께 V도 증가했어야 한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쳐 인간의 생산능력이 지속적으로 감소했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결국 통화의 유통속도가 증가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옳다.

앞에서 통화의 유통속도는 단기간에 있어서는 고정된 것으로 본다고 했는데,150여년은 결코 물리적으로 단기간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금과 은의 유입으로 화폐가 다양해지면서도 그 양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교환이 편리해진 것을 의미하며,따라서 화폐의 유통 속도는 충분히 증가했을 수 있다.

결국 가격혁명을 단순히 금은의 유입에만 귀착시키는 것은 경제이론적으로도 너무 단순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물가가 상승하면 경제구성원 간에 소득과 부가 재분배되는 효과가 있다.

소득은 피고용자에게서 고용자에게로 재분배되고(실질임금의 감소로 인해),부는 채권자에게서 채무자에게로 재분배된다(실질이자율의 감소로 인해).이 같은 현상은 당시 유럽에서도 발생했다.

일정액의 지대를 받던 지주들은 손해를 보고,지대부담이 줄어든 일부 농민들은 생산을 늘리는 기회가 됐다.

상품을 생산해서 판매하던 생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물가상승이 이윤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 중농(gentry)층이 형성되면서 상품생산이 확대되는,말하자면 산업혁명의 전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해로가 개척되면서 아시아와의 교역중심이 네덜란드나 영국으로 바뀌었던 것과 스페인에서 시작되어 영국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가격혁명은 상업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