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eith Jenkins, Re-thinking History, 1991 )
케이스 젠킨스는 영국 잉글랜드 남동부의 웨스트 서섹스(West Sussex)에 있는 치체스터 대학교의 역사담당 조교수다.
그는 '포스트모던' 역사연구 분야에서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다른 역사학 이론서를 제쳐두고 듣도 보도 못했을지도 모를 이 책을 읽을 것을 제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고전(古典)'이라는 딱지가 기존의 권위와 관습에 근거해 붙여진 이름이라면,바로 그러한 고전을 비판의 눈으로 상대화해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을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할 것이다.
적어도 논술의 필수적 구성요소로서 '비판'의 기능을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 질문 바꾸기
"그래서 이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누구'로 대체하고,'위하여'를 뒤에 덧붙여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바꾸어야 제대로 된 물음이 될 것이다.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역사란 다른 집단에는 상이한 의미를 갖는 논쟁적 용어 혹은 담론이며,따라서 역사는 필연적으로 문제투성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책은 질문에 대한 문제제기다.
질문은 답변의 범위와 가능성의 경계를 이미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잘못된 질문에 올바른 답변을 이끌어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바로 이 점이 젠킨스가 역사학 입문자에게 '조금은 낯선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야 했던 이유'인 것이다.
◆ 객관성과 주관성
역사가의 임무가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데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를 위한 역사'를 쓰는 역사가는 애초부터 바람직한 역사가가 될 수 없고,바람직한 역사가란 오직 불편부당하게 과거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믿음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에서 부당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①어떤 역사가도 과거 사건을 총망라하여 재현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사건들의 '내용'은 실제로 무한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②어떤 기록도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단 하나의 기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여러가지 사건들과 상황들이기 때문이다.
이미 과거는 사라져 버렸으므로 실제 과거를 완벽하게 검토할 수 있는 설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그저 다른 설명에 의해서만 검토될 뿐이다.
어떤 역사가의 설명이 정확한가는 다른 역사가의 해석을 통해서만 판단될 수 있다.
…(또한) ③사실 여부가 어떻게 확인되든 또 그것이 얼마나 폭넓게 받아들여지든,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거부되든지 간에,역사는 어쩔 수 없이 개인적 구성물이며 그것은 '이야기 주체'인 역사가의 관점이 표명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④역사가는 과거를 현대용어로 번역하고 이전에는 적용되지 못한 지식을 이용함으로써 이미 잊혀져버린 과거를 복원해내고 동시에 이전에는 결코 이어붙일 수 없던 사물들을 함께 결합시키기도 한다.
그에 따라 인간과 사회의 구성물은 회고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포착되며,기록과 다른 흔적들은 본래의 의도와 기능에서 분리되어 다른 작가들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유형을 예시하게 된다.
…역사는 항상 과거의 여러 측면을 부풀리고 변화시키며 과장한다.
심지어 가장 실증적인 연대기 작가조차도 시간과 장소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이야기 구조를 창안해 낸다."
역사(history)는 단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인 '역사들'(histories)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과거와 바로 그 과거를 서술의 대상으로 하는 역사 서술은 언제나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치될 수 있다는 믿음은 일종의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과거'를 하나의 단일한 진실로 전제하고,그와 같이 전제된 진실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역사 서술 또한 복수의 '역사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에서 과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객관성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사실들이 위와 같은 맥락 위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당초 과거의 사실들이 취사선택되는 과정에서부터 목표에 부합되지 않는 객관적인 사실들은 버려졌을 것이며,그것은 이미 객관성의 여부와는 무관한 것일 수 있다.
젠킨스의 말과 같이 진실이 존재한다기보다 진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국의 경우 한국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의 확립이라는 주관적 목표에 부합되는 진실의 목록들만이 객관적 서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는지,그 상이 또렷해진다.
역사가 만일 특정한 정치적 맥락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의 권력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면,그 어떤 역사서술도 결과적으로는 무엇을 위한,혹은 누군가를 위한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의 의도와도 무관한 것이다.
이는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지식의 모든 영역에서 동일하게 작동한다.
심지어 객관성을 핵심적 가치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과학적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식이 생산되고 소비되고 유통되는 특정한 맥락과 따로 떨어뜨려놓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객관적인 지식은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나올 수 있는 답변의 단수성(單數性)을 넘어서,복수(複數)의 역사의 가능성을 전제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것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인지를 알면서 읽는 것은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 비판과 대안
하지만 대상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대안을 결여하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젠킨스의 설명이 가지고 있는 난점이기도 하다.
저자는 말한다.
"오히려 역사가의 진실에 대한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고,사실들의 가변성을 지적하고,역사가는 이데올로기의 입장을 가지고 과거를 써내려 가야 하며,역사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해체될 수 있는 그저 쓰여진 담론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조해야 한다.
'과거'란 소설가가 사실적 허구 속에서 넌지시 제시하는 '실제세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식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젠킨스와 같은 비판은 주류 역사학이 가지고 있는 난점이나 모순을 호기롭게 지적해내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이는 저자의 말과 같이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진실 효과일 뿐이라는 지적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젠킨스와 같은 입장에 대해 "대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이유는 없다.
그 자체로 의미있는 비판이기 때문이며,근본적인 비판은 애당초 대안 없는 비판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대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유의미한 이유는 기존의 역사서술이 정치적 목적의 시녀가 되고 있다는 점,그리고 그 어떤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정치적 목적이나 맥락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는 점을 예리하게 파헤친 점에 눈 감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일권 (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