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독일,와사등,아관파천,보불전쟁,영란은행….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답은 취음어(取音語)다.
이들 중 안 써도 될 말은? 와사등과 영란은행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은 개화기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속에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거처한 비극적 사건을 말한다.
여기서 '아관'은 '아라사공관'을 뜻한다.
아라사(俄羅斯)는 러시아를 가리키는 말로,줄여서 아국(俄國)이라고도 했다.
또 이를 로서아(露西亞)라고도 했다.
이런 표기는 구한말에 외국 지명을 한자어로 옮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 '아라사'는 사라졌지만 '아관파천'은 학술용어로 남아 있다.
이처럼 한자음을 빌려 옮긴 말을 취음어라 하는데 우리말에는 이런 게 꽤 있다.
'와사등'이란 지난날에 가스등(燈)을 이르던 말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쓴 김광균의 대표 시집이기도 하다.
와사(瓦斯)는 가스(gas)를 일본에서 취음해 만든 한자다.
마땅한 표기수단이 없는 일본인들이 'gas'를 한자를 빌려 '瓦斯'로 적고 'ガス(가스)'로 읽었던 것.그 한자를 그대로 들여와 우리 발음으로 읽은 게 '와사'다.
우리는 한글로 '가스'라 적고 읽을 수 있으므로 지금은 자연스럽게 '와사'란 말은 사라졌다.
'독일'이란 국명도 같은 경로로 들어왔지만 이 말은 생명력에서 차이가 있다.
'독일(獨逸)' 역시 일본에서 도이칠란트를 취음해 만든 단어다.
20세기 초 우리 신문에서도 볼 수 있는 이 말은 일본인들이 도이칠란트의 앞글자 일부(Deutsch)만 취해 '獨逸'로 적고 '도이쓰'라고 읽은 것이다.
이를 한국음으로 읽은 게 '독일'이다.
중국에선 '德意志[더이즈]'라고 취음해 썼는데 우리도 처음에는 이를 줄여 '덕국(德國)'이라고도 했다.
'독일'이 실제 발음과는 전혀 다른 국명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말은 아라사니 불란서(프랑스)니 하는 동종의 취음어들이 원음 표기를 찾아간 것과는 달리 한자 음역어가 그대로 정착해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좀 다르다.
그 까닭은 관용적 사용 외에도 단어 자체가 경쟁력을 갖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 발음에 맞게 도이칠란트로 적는 게 외래어 표기법의 정신에 맞지만 '독일'이란 단어가 짧고 입에 굳어 여전히 국명으로 쓰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글학자이신 정재도 선생님은 '낭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이 말은 프랑스어 '로망티슴(영어의 romanticism)'을 일본에서 앞부분만 취음해 한자로 浪漫이라 적고 '로오망'으로 읽은 데서 비롯됐다.
한국에서 이를 그대로 들여와 소리만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게 '낭만'이다.
우리는 한글로 '로망'이라 적고 읽을 수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게 정 선생님의 지론이다.
하지만 '낭만'은 비록 태생적으론 결함을 안고 있지만 '낭만적' '낭만주의' 등 다양하게 파생어를 낳아 우리 언어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린 말로 보인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부장 hymt4@hankyung.com
이들 중 안 써도 될 말은? 와사등과 영란은행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은 개화기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속에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거처한 비극적 사건을 말한다.
여기서 '아관'은 '아라사공관'을 뜻한다.
아라사(俄羅斯)는 러시아를 가리키는 말로,줄여서 아국(俄國)이라고도 했다.
또 이를 로서아(露西亞)라고도 했다.
이런 표기는 구한말에 외국 지명을 한자어로 옮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 '아라사'는 사라졌지만 '아관파천'은 학술용어로 남아 있다.
이처럼 한자음을 빌려 옮긴 말을 취음어라 하는데 우리말에는 이런 게 꽤 있다.
'와사등'이란 지난날에 가스등(燈)을 이르던 말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쓴 김광균의 대표 시집이기도 하다.
와사(瓦斯)는 가스(gas)를 일본에서 취음해 만든 한자다.
마땅한 표기수단이 없는 일본인들이 'gas'를 한자를 빌려 '瓦斯'로 적고 'ガス(가스)'로 읽었던 것.그 한자를 그대로 들여와 우리 발음으로 읽은 게 '와사'다.
우리는 한글로 '가스'라 적고 읽을 수 있으므로 지금은 자연스럽게 '와사'란 말은 사라졌다.
'독일'이란 국명도 같은 경로로 들어왔지만 이 말은 생명력에서 차이가 있다.
'독일(獨逸)' 역시 일본에서 도이칠란트를 취음해 만든 단어다.
20세기 초 우리 신문에서도 볼 수 있는 이 말은 일본인들이 도이칠란트의 앞글자 일부(Deutsch)만 취해 '獨逸'로 적고 '도이쓰'라고 읽은 것이다.
이를 한국음으로 읽은 게 '독일'이다.
중국에선 '德意志[더이즈]'라고 취음해 썼는데 우리도 처음에는 이를 줄여 '덕국(德國)'이라고도 했다.
'독일'이 실제 발음과는 전혀 다른 국명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말은 아라사니 불란서(프랑스)니 하는 동종의 취음어들이 원음 표기를 찾아간 것과는 달리 한자 음역어가 그대로 정착해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좀 다르다.
그 까닭은 관용적 사용 외에도 단어 자체가 경쟁력을 갖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 발음에 맞게 도이칠란트로 적는 게 외래어 표기법의 정신에 맞지만 '독일'이란 단어가 짧고 입에 굳어 여전히 국명으로 쓰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글학자이신 정재도 선생님은 '낭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이 말은 프랑스어 '로망티슴(영어의 romanticism)'을 일본에서 앞부분만 취음해 한자로 浪漫이라 적고 '로오망'으로 읽은 데서 비롯됐다.
한국에서 이를 그대로 들여와 소리만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게 '낭만'이다.
우리는 한글로 '로망'이라 적고 읽을 수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게 정 선생님의 지론이다.
하지만 '낭만'은 비록 태생적으론 결함을 안고 있지만 '낭만적' '낭만주의' 등 다양하게 파생어를 낳아 우리 언어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린 말로 보인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