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고전읽기] 실전 해제

다음 제시문 (가) (나) (다)에는 죽음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태도가 각기 다르게 드러나 있다.


이들의 다른 점을 기술하고,이를 논거로 활용하여 인간이 죽음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논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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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 플라톤 '파이돈'에서


"오오 나의 벗이여"라고 소크라테스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하면 이제 인생의 여로의 마지막에 이르러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감에 있어,일생 동안 추구해 온 것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충분한 이유가 있네.


그러므로 나는 큰 기쁨을 가지고 내 갈 길을 가는 걸세.


나뿐만 아니라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고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쁜 마음으로 이 길을 갈 걸세."


"아주 옳은 말씀이외다"라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정화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즉 영혼이 모든 방면에서 육체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을 수습하고 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도,될 수 있는 대로 자기만으로 사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시 말하면 육체의 쇠사슬로부터 영혼이 해탈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그렇습니다."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고 해방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요."


"참 철학자들만이 오로지 영혼을 이와 같이 해방시키려 하는 거야.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와 해방이야말로 철학자들이 특별히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의 상태에 가깝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막상 죽음에 당면해서 마다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렇지요."


"오오 심미아스,참 철인(哲人)은 늘 죽는 일에 마음을 쓰고,따라서 모든 사람 가운데 죽음을 가장 덜 무서워하는 자일세.


이렇게 생각해 보세.그들이 늘 육체와 싸우고,영혼과 더불어 순수하게 되기를 원했다면 말일세.


그들의 소원이 성취되어 하데스[死後 世界]에 도착하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바라던 지혜를 얻게 될 희망이 있고 동시에 그들의 원수와 함께 있지 않게 될 걸세.


그런 곳으로 떠나려 할 즈음에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떨고 싫어하는 것처럼 모순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거기에 가면 지상에서 사랑하던 이나 아내나 자식을 만나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되리라는 희망에서 죽기를 원했던 것이 사실이야.


그렇다면 참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이로서,그리고 저 하데스에서만 지혜를 보람 있게 향유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죽음을 싫어하겠는가?


오히려 큰 환희 속에 저승으로 떠날 것이 아니겠는가?


오오 나의 벗이여,만일 그가 참 철학자라고 하면 그럴 것일세.


그는 저 세상에서,그리고 거기에서만 순수하게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말일세.


사리가 이렇다고 하면 내가 말한 것처럼,그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당치 않은 소리일 거야."(중략)


소크라테스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오오 크리톤,자네가 말하는 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걸세.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야.


나는 독약을 좀 늦게 마신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이미 죽을 목숨을 좀 연장시키고 거기 매달린다는 것은 내 자신이 보기에도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네.


그러니 내가 말하는 대로 해 주게."


크리톤은 곁에 서 있던 사환아이에게 눈짓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환아이가 밖으로 나갔는데 한참만에 독약을 내어 주는 사람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은 갈아 놓은 독약을 들고 있더군요.


소크라테스는 그 사람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이런 일에 밝을 테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일러 주시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다리가 무거워질 때까지 그저 걷기만 하면 됩니다.


다리가 무거워지면 누우세요.


그러면 약 기운이 돌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잔을 소크라테스에게 내밀었습니다.


오오 에케크라테스,소크라테스는 아주 태연히 조금도 떨지 않고 또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잔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에게 드리는 뜻으로 한 방울 떨어뜨려도 되나요?


안 되나요?


어떻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오오 소크라테스, 여기서는 마실 만큼밖에 갈지 않습니다."


"알았소.


그러나 저 세상에 가는 여행을 잘 하도록 내가 기도드릴 수는 있을 테지.


또 드려야만 되고.


내 기도대로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잔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기쁜 낯으로 그 약을 마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슬픔을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만,이제 그 약을 다 들이키는 것을 보고는 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래서 얼굴을 가리고 울었는데,이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그러한 벗을 여의게 된 제 자신의 불행을 생각한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먼저 운 건 아니지요.


저보다 먼저 크리톤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서더군요.


아폴로도로스는 벌써부터 줄곧 울고 있었는데,이때에는 큰 소리로 흐느껴 울어 우리들 모두의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소크라테스만이 여전히 조용했어요.


"그게 무슨 꼴인가"라고 소크라테스가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한 사람들 다 보겠네.


내가 아낙네들을 내보낸 것은 그들이 이런 창피스런 꼴을 보일까 봐 그런 거야.


사람은 모름지기 조용히 죽어야 한다고 들어 왔어.


조용히,그리고 꿋꿋하게 행동하게."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걷더니 한참만에 다리가 무겁다고 말하고는 반듯이 드러눕더군요.


이건 그에게 약을 준 사람이 그렇게 하라 한 거지요.


소크라테스가 누우니까 그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다리와 발을 살펴보더군요.


그리고 한참 있다가 발을 세게 누르면서 감각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소크라테스가 "없다"고 하니까,그 다음엔 다리를 눌러 보고는 우리에게 몸이 차가워지고 굳어진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다시 우리에게 말하기를, "독이 심장에까지 미치면 마지막입니다"라고 하더군요.


하반신이 거의 다 차가워졌을 때에 그 분은 얼굴에 덮었던 것을 벗고 ―얼굴을 덮었더랬으니까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최후의 말이었습니다.


"오오 크리톤,아스클레피오스[의학의 신.병이 나으면 감사하는 뜻에서 이 신에게 닭을 바치는 것이 관례였음]에게 내가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기억해 두었다가 갚아 주게."


[나] - '장자'에서


①노자가 죽었을 때 진일은 문상을 가서 형식적인 곡(哭) 세 번만 하고 나와 버렸다.


제자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물었다.


"그분은 선생의 벗이 아닙니까?" 진일은 대답했다.


"그렇지."


"그렇다면 그런 문상으로 괜찮을까요?"


"괜찮아.


처음 나는 그를 인물이라고 보았네만 지금은 달라.


아까 내가 들어가 문상할 때,늙은이는 제 자식을 잃은 듯이 곡을 하고 있고,젊은이는 제 어버이를 잃은 듯이 곡을 하고 있더군.


사람들이 모인 것은 그가 반드시 요구하지는 않았더라도 슬픔을 말하고 곡을 하도록 은연 중 시킨 바가 있기 때문이지.


이것은 생사(生死)라는 자연의 도리에서 벗어나 진실을 거역하고 하늘로부터 받은 본분을 잊음이야.


옛날 사람은 이것을 '하늘을 도피한 벌'이라고 했지.


그가 어쩌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그가 어쩌다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죽을 운명을 따랐을 뿐이야.


그 때를 편안히 여기고 자연의 도리를 따라간다면 기쁨이나 슬픔 따위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걸세.


이런 경지를 옛날 사람은 '하늘의 속박에서 벗어남'이라고 불렀다네."


②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가 문상을 갔다.


장자는 마침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아내와 함께 살고 자식을 키워 함께 늙은 처지에 이제 그 아내가 죽었는데 곡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무정하다 하겠는데,하물며 질그릇을 두들기고 노래를 하다니 이거 심하지 않소!" 하고 말했다.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다.


"아니,그렇지가 않소.


아내가 죽은 당초에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소.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던 거요.


그저 삶이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소.


비단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氣)도 없었소.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형체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된 거요.


이제 다시 변해서 죽어가는 거요.


이는 춘하추동이 되풀이해 운행함과 같소.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 있소.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 한다면 하늘의 운명을 모르는 거라 생각되어 곡(哭)을 그쳤단 말이오."


③갑자기 이번에는 자래가 병이 났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곧 죽을 것 같았다.


그 아내와 자식들이 둘러싸고 울고 있었다.


자려가 문병을 가서 그 꼴을 보고 말했다.


"쉬이,저리들 가요.


죽는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아요."


가족을 물리치자 그는 문가에 기대 서서 자래에게 말했다.


"위대하구나, 조화(造化)의 힘은 또 자네를 무엇으로 만들고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자네를 쥐의 간(肝)으로 만들려나,아니면 벌레의 팔뚝으로 만들려는가."


자래가 대답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 동서남북 어디든 그 명령을 따르게 만들지.


자연의 변화가 사람을 따르게 함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정도의 것이 아닐세.


조화가 내 죽음을 바라는데 내가 듣지 않으면 나는 곧 순종하지 않는 셈이 되네.


그러니 그 조화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자연은 내게 형체를 주었지.그리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고,늙음으로 나를 편하게 하며,죽음으로 나를 쉬게 해 주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하나로 이어진 것이니,내 삶을 좋다 함은 바로 내 죽음도 좋다고 하는 게 된다네."


[다] -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옆에서 손자가 곤히 자고 있었다.


꿈이었으면 하는 몽롱한 착각을 즐길 새도 없이 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서운 괴물처럼 가차없이 육박해왔다.


집에서 같으면 설마 꿈이겠지 하고 현실감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꽤 길었으련만.


아쉬운 건 그뿐이 아니었다.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지 아무도 모른다.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발산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 같은 게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한 번도 실지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한 적은 없다.


번번이 그 직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미치는 것조차 여의치 않은 내 강철 같은 신경이 싫고 창피스럽다.


…(중략)…


원태야,원태야,우리 원태야,내 아들아.


이 세상에 네가 없다니 그게 정말이냐?


하느님도 너무하십니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지 25년5개월밖에 안 됐습니다.


병 한 번 치른 적이 없고,청동기처럼 단단한 다리와 매달리고 싶은 든든한 어깨와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코와 익살부리는 입을 가진 준수한 청년입니다.


걔는 또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젊은 의사였습니다.


그 아이를 데려가시다니요.


하느님 당신도 실수를 하는군요.


그럼 하느님도 아니지요.


…(중략)…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에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라는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금 맹렬한 포악이 치밀었다.


신은 죽여도 죽여도 가장 큰 문젯거리로 되살아난다.


사생결단 죽이고 또 죽여 골백번 고쳐 죽여도 아직 다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증오의 최대의 극치인 살의(殺意),나의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암 있어야 하구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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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는 죽음의 문제를 동서고금에서 어떻게 인식해왔는지에 대해 제시문을 통해 파악하고,현대사회에서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먼저 제시문에서 드러나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제시문 (가)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구하러 온 심미아스와 크리톤에게 자신이 어째서 죽음을 그대로 맞이하려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반부와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후반부로 나누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와 해방이야 말로 철학자들이 특별히 마음을 쓰는 것"이고,그러므로 "죽음의 상태에 가깝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 막상 죽음에 당면해서 마다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한다.


철학자들은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인데,그토록 바라던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우리는 제시문 (가)에 나타나 있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긍정적 태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제시문 (나)는 장자에 실려 있는 진일,장자,자래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각각 보여주고 있는데,이들 모두에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그가 어쩌다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죽을 운명을 따랐을 뿐인 것"이고,삶과 죽음이란 "춘하추동이 되풀이하여 운행함과 같다".그래서 죽은 사람은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있는 것"이며,"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하나로 이어진 것이니,내 삶을 좋다 함은 바로 내 죽음도 좋다고 하는 게"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 모두는 삶과 죽음을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노자의 죽음을 대하는 진일의 태도나 아내의 죽음을 대하는 장자의 태도는 슬픔과 아쉬움이라기보다는 섭리를 따르는 무연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제시문 (다)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녀에게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로 여겨질 만큼 죽음이란 그녀에게 피해야 할 것이며,그에 따라 그녀가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독신(瀆神)을 저지를 만큼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제시문에서 드러나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하게 짚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제시문 (가)는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고,제시문 (다)는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쉽게 드러난다.


제시문 (나)는 죽음이 삶과의 순환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순응하도록 요구한다.


이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제시문 (다)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제시문 (나)와는 달리 '삶과 단절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제시문 (가) (나)와 달리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부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문 (다)에서 간파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의미가 어째서 이렇게 부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는가를 따져보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죽음을 부정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죽음이 갖는 또다른 의미가 무엇이 될지를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제시문(다)의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매우 고통스러워한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외침과 절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마침내 신과 세계 전체를 부정하는 데에까지 이끌어가고 있다.


앞으로 이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끊임없이 떠올릴 것이며 그럴 때마다 기억의 고통스러움에 괴로워하며 생각할 것이다.


'내 아들의 죽음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성경의 욥기를 보면 주목할 만한 장면이 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이유 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괴로움의 끝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난다.


아마 욥처럼 이 어머니도 자식의 죽음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곱씹어 생각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마침내 어느 순간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그 고통의 내용은 단지 죽음만이 아니다.


가난에 힘겨워하는 사람,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 등 고통 받는 사람들 모두에게,자신의 경험했던 고통을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어떠한 과정인가.


바로 그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즉 타자)을 이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고통을 토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태도에서 우리는 '참된 진리'의 의미와 만나게 된다.


어머니에게 고통을 안겨준 아들의 죽음은 개인적 삶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서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에 이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죽음과 고통의 의미는 바로 타자의 삶을 포용하고,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윤리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결론에서 다다를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드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도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


이 모든 예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고통을 쉽게 수용하지 않으면서 참다운 신뢰와 믿음 속에 '영원자'와 끝까지 싸운 사람은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도 결국에는 참된 진리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아무도 고통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고통 당해 본 사람은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제시문 (가)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죽음을 긍정하는 철학자의 태도는 삶의 참된 의미와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말한 이데아의 상기와 이데아의 인식을 기반으로 한 현실 적용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 박세진 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