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고전읽기]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

1. 플라톤의 철학적 방법


플라톤의 '대화편' 속 주인공인 소크라테스(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라 해야 할 것이다)는 아무리 하찮은 사람의 이야기도 그냥 흘려 듣는 법이 없다.


그 사람이 아무리 멍청하고 우스운 질문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대화를 이끌어 나간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무뢰배,도통 귀를 닫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에게도 좌절하지 않는다.


장소와 사람은 다르지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본질을,이데아를 찾아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가 성공적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자신의 무지를 토로하면서 끝나는 대화편도 있고 모호한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진정한 철학이란 바로 이런 플라톤의 태도에 있는 것 아닐까?


변하지 않는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거창한 언명보다 내 삶에서 느끼는 문제를 토로하고 그것을 함께 고민해 주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의미일 것이기 때문에.


오늘 소개되는 플라톤의 '파이돈' 대화편은 상기론 증명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바로 이 파이돈 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이돈에 나타난 상기론 증명은 이데아론의 밑바탕 위에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상기론 증명을 살피는 일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인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2.파이돈에서의 이데아


파이돈 편의 대화는 감방에 갇힌 소크라테스가 죽기로 되어 있는 날 아침부터 죽기 바로 직전까지 이뤄진다.


대화의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는 대담하고도 평온한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슬퍼하는 그의 추종자들을 위로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철학자에게 좋은 것이므로 자살해서는 안 되지만 죽음을 당하게 될 때에는 슬퍼하거나 죽지 않으려고 안달해서는 안 되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열정,그리고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 불멸을 추종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상기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상기란 어떤 것을 감각하고 지각할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을 말한다.


즉 배움이 바로 상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배운다는 것은 그 때 처음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생전에 인식했다가 육체와 결합하여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망각한 다음 다시 감각을 통해 기억해 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인식은 이데아에 관한 것이다.


이데아는 '동일함 그 자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동일함 그 자체'는 인간 외부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심미아스의 초상화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만약 심미아스를 모르는 사람이 심미아스의 초상화를 통해서 그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초상화가 아무리 심미아스와 똑같다 하더라도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만일 심미아스 자신을 이전에 보고서 알고 있는 경우라면 심미아스의 초상화만 보더라도 심미아스 자신을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다.


상기는 이와 같은 이치에서 행해진다.


우리가 '동일함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인식의 새로운 획득이 아니라 잊어버렸던 인식의 회복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일한 사물을 통해서 '동일함 자체'보다 그들이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즉 '동일함 자체'를 떠올리는 것은 그것들을 보기 이전에 '동일함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동일함 자체'에 관한 논증은 하나의 대표성을 띠게 되는 것이지 다른 여타의 이데아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동일자의 증명을 마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동일함 자체뿐만이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정의 자체, 성스러움 자체 등 우리가 그것 자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이기 때문일세.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 모두에 대한 인식을


태어나기 전에 획득했음이 틀림없네.>



'동일함 자체'에 대한 인식을 상기에 의해서 얻는 주된 이유는 그것을 우리가 현실 속에서 직접 인식할 수 없고 다른 것을 통해서밖에 생각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3.이데아와 실천의 문제


플라톤의 이데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난점은 아마도 이데아의 실재성과 실재하고 있는 이데아가 개별자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위의 논증에서 보았듯이 객관적 본질을 의미한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간에 그것은 현실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객관적 본질이 '파이돈'에서처럼 현실 세계와 별도로 존재하는 세계를 설정하게 되면,이데아들 상호 간의 관계,이데아 세계와 현실 간의 관계가 문제로 대두된다.


왜냐하면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데아 세계가 존재하더라도 현실 세계와 무관한 것이라고 한다면,그 이데아에 대한 인식과 앎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지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앎은 곧 덕이다'라고 했다.


인간의 올바름은 그 사람의 지식에 달려 있고 이는 곧 앎에 의해 행위가 자동적으로 통일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소피스테스들은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순박함을 조롱하고 비판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에게는 어떻게 이론과 실천을 통일시킬 것인가가 중요하게 제기된다.


플라톤은 이를 대화편 '법률'에 제시된 측정술을 통해 극복한다.


측정술은 인간의 행위(praxis)가 가장 훌륭한 상태에 놓이도록 제대로 헤아릴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 측정술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참된 앎(episteme)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한 참된 앎은 바로 이데아의 상기로부터 얻게 되고 그 이데아에 대한 상기는 실천 즉,인간 행위의 본이 된다.


그러므로 측정술의 사용에 앞서 본으로서의 이데아 내지 형상의 인식이 요구된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을 철학자로 보았다.


철학자는 혹독한 수련을 거치고 성실히 인습적인 행위에 관여하다가 최종적으로 선의 이데아에 대해 직관한 다음 이를 본으로 하여 행위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측정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되며,선의 이데아는 철학자의 측정술에 의해서 실현되는 셈이다.


4.이데아론의 의의


플라톤은 여러 저작을 통해 이데아의 실재성과 구체적 성격들을 규정하려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이데아와 상기설의 문제를 완전히 증명해 내는 데도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설을 단순히 신화에 의거한 근거 없는 이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당시 아테네 사회는 모든 전통 법질서와 도덕이 무시되고 타락과 물질적 쾌락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답게 체계적인 법과 정의,도덕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당대의 대표적 논객들인 소피스테스에 맞서 존재론,인식론,그리고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체계적인 철학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플라톤이 목표한 것이 바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며,이를 보증해 주는 절대적 본으로서 이데아를 제시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가진 의의라고 할 수 있다.


< 박세진 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