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처펀드로 명성높은 '윌버 로스'] 망해가는 기업 사들여 구조조정

생글생글을 읽는 여러분 가운데 벌처펀드(vulture fund)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vulture는 사전을 찾아보면 '독수리''약한 자를 희생시키는 무자비한 사람''사기꾼' 등으로 뜻이 나와 있다.


벌처펀드는 죽거나 죽어가는 짐승의 살을 잔인하게 뜯어 먹는 독수리의 행태에 빗대어 '쓰러져가는 기업을 인수한 뒤 상당수 종업원을 해고하거나 기업을 쪼개어 파는 등 냉정한 구조조정을 행하는 펀드 또는 그런 펀드를 운용하는 업체'를 말한다.


이런 벌처펀드를 운용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다.


그것은 한국뿐 아니라 기업의 인수·합병(M&A)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미국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날지언정 마찬가지 현상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 중에는 큰 돈을 번 사람들이 종종 있다.


헐값에 기업을 인수해 구조조정을 한 뒤 잘만 되팔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위험이 큰 것도 사실이다.


인수 후 회생이 불가능하거나 매각이 안 되면 투자금액을 거의 다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최근 윌버 로스(Wilbur Ross)라는 한 벌처투자자(vulture investor)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했다.


이 사람은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할지 모르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의 이름은 한국 신문지상과 뉴스에 거의 매일같이 등장했다.


우리가 흔히 'IMF 사태'라고 부르는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 한국에 등장해 많은 활약(?)을 했던 그는 2003년 이후 한국에서 슬그머니 종적을 감춰버려 지금은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인물이다.


그런 윌버 로스가 요즘 새삼스럽게 미국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미국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 델파이가 최근 파산보호(우리의 법정관리와 유사한 제도)를 신청한 것에서 볼 수 있듯,미국 자동차 부품업계가 아주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자동차 부품업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로스의 주특기는 '빌빌대는 기업'을 몇 개 사들여 종업원 수를 줄이는 등 구조개편을 하고,비슷한 회사끼리 합친 뒤 기업가치를 높여 비싼 값에 되파는 것이다.


그는 최근 몇 년간 미국 내에서 이와 유사한 거래를 연속 성공시켜 기업구조조정에는 '선수'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이와 유사한 일에 종사하면서 수많은 기업을 사고판 베테랑이다.


로스가 손댄 업종과 기업은 대부분 회생하는 통에 그는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철강업 직물업 석탄업 등에 손대 연속 '대박'을 터뜨렸다.


2002년부터 부도난 철강업체 다섯 곳을 사들여 만든 인터내셔널 스틸그룹(ISG)이라는 회사를 지난 4월 무려 매입가의 10배에 해당하는 45억달러에 팔아치우는 솜씨를 보이기도 했다.


미탈스틸이라는 다국적 철강업체는 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일약 세계 최대 철강업체로 발돋움했다.


그런 로스가 이번에 자동차 부품업체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그가 자동차 부품업체까지 제대로 살려낼 수 있을까.


자동차 부품업체들은 GM 포드 등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업체들의 부진으로 연쇄적인 어려움에 빠져 있다.


자동차 부품업은 우리의 관심과는 동떨어진 업종처럼 보이지만 자동차 왕국인 미국에서는 아주 중요한 산업이다.


이 업종의 회생 여부는 미국인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가 소형 부품업체들을 시작으로 해서 델파이 인수전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그는 델파이 최고경영자와도 개인적으로 가까워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물론 미국 언론이 그에게 고운 시선만 던지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기업에 달려들어 돈을 버는 그의 사업 방식이 환영만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스 스스로도 자신에게 벌처(vulture)라는 이름을 붙이는 걸 아주 싫어한다.


그는 "독수리야 시체의 살을 뜯어 먹고 나머지는 썩게 내버려 두지만 나는 죽어가는 회사를 살아나게 하고 더 나아가 성장하게 만든다"며 자신과 벌처펀드를 비교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런 그가 자동차 부품업계를 소생시킬지,아니면 그냥 썩게 내버려 둘지는 두고 볼 일이다.


김선태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