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네 개의 제시문에 공통되는 주제를 말하고 제시문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시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2005년 고려대 정시 논제)
1. 우리가 가진 근본 욕구들 중에는 도덕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큰 조직에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를 불가피하게 억압받고,조직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강요받는다.
그 규칙은 인간에 의해 고안되었지만 인간 자체는 아니다.
아무리 세심하게 만들어졌어도 거기에는 '사람의 손길(human touch)'과 같은 유연성이 없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조직의 구성원은 도덕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행동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게 된다.
"미안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제가 받은 지시 사항입니다."
이처럼 큰 조직들은 아주 불량하고 부도덕하게,또는 아주 어리석고 비인간적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이는 그 구성원들이 본래 그래서가 아니라 그들이 조직의 크기에서 오는 하중을 받기 때문이다.
큰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지만 이런 비판은 마치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배출한다고 해서 운전자를 나무라는 것과 같다.
천사라도 공기를 더럽히지 않고 차를 운전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결국 잘못은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있다기 보다는 조직의 크기에 있는 것이다.
개인들로 하여금 도덕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가진 사회는 부도덕하다.
조직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거대주의에 의한 합리화'에 중독된 현대인들은 너무 커진 규모 속에서 좌절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2. 야구공은 큰 공인가,작은 공인가?
야구공은 탁구공에 비해서 크지만 축구공에 비해서는 작다.
강은 개울보다 크지만 바다보다는 작다.
야구공도 크다고 말할 수 있고,강도 작다고 말할 수 있다.
개울만 보던 사람에게는 강이 커 보이지만,바닷가에서 살던 사람에게 강은 작아 보일 것이다.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에 갔을 때,우리는 모든 것들이 너무 작아 보여 깜짝 놀라기도 한다.
어릴 때는 그렇게 커 보이던 대문이 이제는 작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어린이들의 그림에서는 종종 사람의 얼굴이 몸보다 크게 그려진다.
아마도 어린이의 심리적 경험 속에서는 얼굴이 그만큼 크고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는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었다"고 갈파했고,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도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고 노래했다.
티끌이 곧 우주요,모래가 곧 세상이라면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오늘날 조그만 메모리칩 하나에 거대한 도서관을 담을 수도 있으니 그것이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치열한 극소화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반도체 산업에서 새로 개발된 메모리칩이 더 작아진 것인지 더 커진 것인지 말하기 곤란하다.
외형이 작아져도 용량은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조그만 나비의 날갯짓이 바다 건너 거대한 허리케인을 일으킨다는 '나비효과'에 대해서 말한다.
또 원자보다 작은 극소의 세계와 우주와 같은 극대의 세계가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의상 대사와 블레이크가 노래한 바가 문학적 수사만은 아닐 것이다.
3.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국가나 민족은 물론 지역과 도시까지도 지나치게 크고 추상적인 조직체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오늘의 사회가 '잡히지 않는 전망'을 이룬다고 설명한 바 있다.
즉 오늘날의 사회에서 어떠한 사람이나 집단도 독자성을 갖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 의해 제약을 받게 되어 있지만,이 관계의 정확한 포착은 우리 손을 벗어나 계속적으로 도망가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제한하면서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 현대사회의 기괴한 조직은 도시에서 잘 나타난다.
문화의 참 생명력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향상 및 해방과 풍요화에서 온다면,우리의 문화에 대한 생각도 '잡히지 않는 전망'을 넘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참으로 핵심적인 문화공간은 민족이나 도시보다도 더 작은 집단이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가능한 집단,사회학자들이 '대면집단'이라고 부르는 사회공간이 우리의 문화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화공간은 하나의 확정된 물리적 구획으로 보다는 여러 집단의 유기적인 상호관계 속에 구성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대면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한편으로는 개인적 자아의 내면공간에 이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또는 도시로 번져나가고 국가나 민족,그리고 세계의 지평으로 둘러싸인다.
소집단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구체적 삶의 공간으로서 구체적 인간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지역이나 도시는 이 소집단에 다양성과 객관성을 부여하는 필수적 요인이 된다.
도시든,지역이든,국가든,이러한 것들은 소집단의 구체성의 원리가 확대될 수 있는 것으로 성립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테두리는 '잡히지 않는 전망' 또는 제약으로서만 작용하는 조직이기를 그칠 것이다.
4. 북녘 바다에 곤(鯤)이란 물고기가 있다.
그 몸집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 물고기가 화(化)해서 새가 되는데,이름 하여 붕(鵬)이라 한다.
붕의 몸집 또한 몇 천리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그런데 이놈이 한 번 화가 나서 날았다 하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을 가린 구름처럼 모든 것을 뒤덮는다.
괴이한 이야기만 적어 놓은 '제해(齊諧)'라는 책에서는 "대붕(大鵬)이 남녘 바다로 날아가려면 물 위를 삼천리나 달려야 비로소 날아오르게 되고,그런 뒤 다시 날개로 바람을 치면서 구만리를 올라가서야 항로를 잡는다.
그러고는 그대로 육 개월을 날아 목적지인 남녘 바다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몸집이 크면 그를 받아들일 공간도 커야 하고 정신이 위로 비상하려면 그 경지 또한 높아야 한다.
바람의 공간이 넓지 않으면 큰 새가 날 수 없다.
대붕이 바람을 치며 구만리 창공을 날아오르는 것도 그래야만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아무런 장애 없이 남녘 바다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치를 모르는 매미와 새끼 비둘기가 비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뽕나무 그늘에서도 얼마든지 힘껏 날 수 있고 잠깐 사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데,무엇 때문에 구만리나 날아올라서 남쪽으로 가는 것일까?
불과 두어 길 되는 공간에서도 뛰놀 수 있고 쑥대밭 사이에서도 자유로이 날 수 있으니,이 또한 최대의 소요(逍遙)가 아닌가? 어째서 대붕처럼 날아야만 제일이란 말인가?"라고 한다.
작은 지혜(小知)는 큰 지혜(大知)에 미치지 못하고,짧은 시간(小年)은 긴 시간(大年)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밤과 새벽을 알 리 없고 여름벌레가 눈과 얼음을 알 리 없는 것이다.
이것이 큼(大)과 작음(小)의 차이이다.
새끼 비둘기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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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는 2005년 고려대 정시에 출제되었는데,'크고 작음의 규모'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보여주는 글들을 제시문으로 채택했다.
공통의 주제 의식을 뽑아내는 능력을 바탕으로 각각 다른 차원의 글을 수험생이 구조화해 읽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일 수 있는가를 평가하기 위한 문제다.
따라서 '규모'와 관련해서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추출하고 학생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 내야 한다.
네 개의 제시문이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히고,자신의 주장에 대한 주요한 논거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통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글들을 문제 제기와 대안,보론 등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제시문 (1)은 '집단'과 '개인'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논제 전체의 주제인 '규모의 적절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집단적 가치와 질서를 준수하도록 강요받거나 억압당하는 개인은 무력감에 빠지고 좌절감에 시달린다.
현대 사회에서 '규모'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의 자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큰 조직의 비인간적 규칙이 개별자의 도덕적 인간성을 고려할 수 없는 이유를 '조직의 큰 규모'로 설명하고 있다.
이때 크고 작음은 실제적인 규모,즉 '개인'과 개인의 합인 '집단'의 문제다.
이는 집단의 원리와 존재 이유가 개인의 그것과 동일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거대화가 이뤄지는 현대사회의 부정적 국면을 '거대주의'라는 시각틀로 분석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제시문 (2)는 똑같이 '규모'를 문제 삼고 있지만,그것이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문제이거나 실제적인 수치의 문제가 아님을 역설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판단은 '그것을 비교하는 대상'을 무엇으로 상정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절대적 판단에 대한 회의와 반성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 기대기 쉬운 관습적 사고의 틀을 뒤흔들어 판단에 대한 내적 구조를 먼저 살피도록 요구한다.
가령 '작은 것 속에 큰 것의 구조가 숨어 있다'는 가능성이 발견될 수도 있다는 논리다.
내적 구조를 살핀다는 것은 전혀 다른 형상을 취하더라도 동일한 원리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크기는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극소화경쟁이나 '나비효과'와 같은 이론들을 크기에 대한 주관적 상대주의의 한 사례로 검토함으로써 제시문 (1)이 제기한 규모의 적절성이라는 문제의식에 변화를 주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규모의 문제가 단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임을 암시함으로써 (1)의 문제의식에 대해 정반대의 논리를 세울 수 있다.
규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거대주의가 다른 축에서는 극소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다른 한편으로는 (1)에 대한 보론으로 읽힐 수도 있는 관점,즉 극소화에 대한 추구를 결국 거대주의의 다른 한 측면으로 읽을 수도 있다.
제시문 (3)은 큰 규모의 집단에 의해 발생될 수 있는 문제점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시사해준다.
소집단,즉 '대면 집단'을 통해 현대사회의 거대 집단의 문제점을 단계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논리다.
제시문 (1)과 제시문 (2)가 보여준 문제의식을 함께 포괄하면,모든 종류의 거대화는 '추상화'라는 과정과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추상적 조직체를 어떻게 구체적인 생활의 차원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가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제시문 (3)이 제시문 (1)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제시문 (3)에서 시사한 '대면성'이라는 개념은 제시문 (1)에서 제기한 '사람의 손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시문 (4)는 다른 세 개의 제시문과 달리 동양고전에서 출제됐다.
크고 작음의 문제를 개별자의 능력 문제로 전환함으로써 갈등을 최소화하고,초월적 세계에 대한 혜안을 보여주는 글이다.
즉 '규모'의 문제는 주체의 포용 능력이나 시야의 문제로 환원돼 "큰 뜻을 품어라"는 교훈과 지혜를 전해준다.
여기서 큰 것과 작은 것은 비유적 차원에서 제시된다.
실제적인 규모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크기를 문제 삼는 주체의 태도를 문제 삼아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방식이다.
제시문 (1)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문 (3)의 시각으로 해결하는 하나의 시각이 있다면,제시문 (4)의 시각을 통해 제시문 (2)의 상대적인 규모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반대로 내적 구조로서의 '큰 것'이 갖는 의미를 읽는다면,'몸집이 크면 그를 받아들일 공간도 커야 하고 정신이 위로 비상하려면 그 경지 또한 높아야 한다'는 진술은 안과 밖,개인이나 집단을 융화시키고 포괄할 수 있는 '크기'를 긍정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규모의 문제를 접근할 때 주의하거나 유념해야 할 점을 시사해준다.
개별자의 존재 의의나 소집단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큰 집단의 중요한 역할이나 기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제시문 (2)에서 상대적 인식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제시문 (4)의 시각은 현대사회의 개인과 집단의 규모를 문제 삼을 때,거대집단을 통해 폐해만을 읽으려고 하는 것,가령 국가의 존립가능성이나 법적 통제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가 갖는 위험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상대적 가치를 보여주는 제시문 (2)와 (4)는 모두 거대규모에 대한 한계와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는 시각을 보여줌으로써 논술문의 집필 방향을 다양하게 열어 놓고 있다.
학생들로서는 현대과학이 증명해 주고 있는 '외적 크기'의 불확정성이나 동양고전의 신화적 상상력이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 크기'에 대해 참신하고 창의적인 논술문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편의상 논술문의 집필방향을 크게 '현대 산업사회의 거대주의에 대한 비판과 극복방안'이라는 주제와 '현대사회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크기'라는 주제로 양분해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현대사회의 거대주의가 대중과 개인을 좌절감에 빠뜨렸다는 인식을 우리 주변의 사례들을 통해 문제제기하고,제시문 (1)과 (3)이 보여주는 '대면성'과 '손길'이라는 개념을 통해 거대주의가 억압적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설명한 뒤 '대면성'과 '손길'이 가능한 크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논술문을 집필하면 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거대주의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되,무조건 큰 것이 나쁘다는 방향으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다른 한편 '현대사회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크기'라는 주제로 논술문을 쓸 때에는 도서관 하나의 장서가 다 들어갈 수 있는 손가락 크기의 마이크로 칩처럼 외적인 크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문제제기가 필요할 것이다.
결국 크기에 대한 획일화와 강박의 구조를 극복하는 방법은 더 넓고 높은 차원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역설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진정한 '큼'이 인간의 정신과 내면으로부터 비롯돼야 함을 보여주되,실제 사회에서 거대주의가 보여주었던 문제점들을 외면하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언제나 주장하는 논리와 반대하는 논리 사이에서 맹목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규모' 또는 '크기'라는 공통된 인식의 지점을 발견하고,공통된 주제에 대한 각각의 제시문들의 견해 차이를 학생 자신의 논리를 중심으로 구성하고,주장과 논증의 방식으로 논술문을 작성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동양 고전의 신화적 상상력이나 현대 과학의 불확정성이 보여주는 초월적인 '크기'개념 때문에 글쓰기가 다소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노과학의 미시세계와 나비효과의 우연성,그리고 천문우주학의 광대함은 쉽사리 통어하기 어려운 규모와 차원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모든 인간들이 고통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거대주의'가 그 자체로 크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소통 불가능성과 추상적 비전이라는 것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나름의 주장과 논거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 이현승 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