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F 슈마허(이상호 옮김, 문예출판사, 2001)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성장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생태계의 파괴를 지양할 수 있는 반성과 전망을 담고 있다.
생태계의 파괴는 인류 문명 전체에 대한 하나의 명백한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다.
'파생된 사유체계로서의 경제학',즉 메타경제학적 관점으로 현실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성장과 생산에 대한 근대인의 일방주의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지난 100년 동안 과학기술의 발전은 기회보다 위험을 좀 더 빠르게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자연의 저 위대한 자기균형 체계가 특정한 측면과 지점에서 점점 더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그러한 해결의 결과로서 열 가지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코모너(Barry Commoner) 교수가 강조하듯,이 새로운 문제는 우연한 실패의 산물이라기보다 기술적 성공의 산물이다."
◆모든 집단이 무한히 성장할 수는 없다
발전과 번영이 양적인 의미의 증가만을 의미하는 순간 우리는 예견된 실패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는 근대 이후 경제학에 새로운 과제로 부각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근대사회의 기술적 성공의 산물이다.
모든 나라와 민족,집단이 무한히 성장할 수 있으며,물질적 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슈마허가 간디에게서 빌려 온 "대지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지혜로운 말은 오늘날 풍요 속 빈곤의 이유를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성장은 여전히 모든 국가의 목표다.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엄청난 속도의 경제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제3세계 개발도상국가들과 여전히 자신의 대륙을 넓히기 위한 선진국들의 '신대륙' 찾기 경쟁은 세계화 시대에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심지어 석유자원을 둘러싼 국가간 알력싸움이나 전쟁을 슈마허는 이미 예견하고 있다.
"연료자원은 매우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으므로 그것의 공급 부족은 아무리 소량이라고 할지라도 곧바로 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경계선에 따라 '가진 나라'와 '갖지 못한 나라'로 분할하곤 한다.
오늘날 중동이나 북아프리카같이 특별히 혜택받은 지역은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서유럽이나 일본 같은 고도 소비지역은 잔여 자원을 나눠 갖는 애처로운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앞으로 분쟁이 발생한다면 그 불씨는 바로 여기에 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성장은 없는가
"오늘날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물리적 수단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평화문제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심각한 듯 보인다.
우리 경제생활과 관련해서 영속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어떻게 평화가 달성될 수 있겠는가?"
슈마허의 이러한 지적은 이미 30년 전의 것임에도 불구,우리는 여전히 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국가간 전쟁이든 자연재해로 인한 엄청난 규모의 파괴이든 그것이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시켜 온 '개발'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격렬한 탐욕의 결과임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언제나 인간에 대한 위협은 인간 자신의 손에 의해 자행되었다.
전쟁고아를 만드는 일,자연을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웃과 자연,심지어 자신까지도 철저하게 '이익'이라는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 한 진정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과 반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계적인 기아와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하는 이유도 같은 데서 찾아야 한다.
◆규모의 경제학을 넘어서기 위하여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거대주의(gigantism)라는 우상 숭배로 고통을 겪는다.
…어느 행동이나 그에 적합한 규모가 있으며,행동이 좀 더 많은 적극성과 친밀함을 요구하는 것일수록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적절한 관계 망은 많아진다."
규모를 문제 삼는 순간 슈마허는 이미 '자연적 순환',즉 균형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둔 것이다.
거대주의와 팽창주의는 역사에서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켜 왔다.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과 약탈이 그러했으며,거대도시의 문제점들이 그러하다.
"거대도시는 수백만명이 도시의 실질적인 가치를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엄청난 문제들을 야기하면서 인간을 타락시킬 뿐이다."
엄청난 인구의 밀집은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서의 급격한 인구 감소를 낳았으며,결과적으로 도시와 농촌을 모두 '뿌리 뽑힌 사람들'의 운집지역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비인간화와 착취,소통의 마비는 이러한 뿌리 뽑힌 사람들의 도시에서 더욱 지배적이다.
규모가 커질수록 그러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명확한 질서를 강화하는데 이는 동시에 창의적인 자유분방함을 억압한다.
현대인은 군중 속에서 고독감을 심화시키며 타자화한 욕망의 뿌리를 좇아가도록 방치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빈곤 좌절 소외 절망 몰락 범죄 현실도피 스트레스 혼잡 추악함 정신적 죽음' 따위의 모습과 대면하는 계기는 거대주의에 있다.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규모를 구현하고,인간과 인간이 목적적 존재로서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조직과 질서를 만드는 일은 공격적이지 않으며 관계 지향적이고,같은 이유로 미래 지향적이다.
미래 지향적 구조를 추구하면서 소비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인간을 건강한 생산자,창조적 생산자로 일으켜 세우는 일이 미래적 비전을 실현하는 길이다.
더불어 이러한 미래적 비전에는 새로운 형태의 소유 개념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크기'는 무엇인가?
우리들 삶의 주변을 먼저 들여다 보자.
까르푸 이마트 홈플러스 같은 대형 할인점이 너무나 익숙하게 우리 삶의 중심으로 밀려 들어와 있다.
넓은 주차장,다양한 품목,가득 쌓여 있는 '값싸고,질 좋은 물품들'은 대형 쇼핑몰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다.
그러나 이러한 편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차를 끌고 나서야 하며,불편한 교통 체증 탓에 시간을 낭비하고,'필요할지 모르는' 물품을 소비하는 낭비를 부추기며,'흥정'이나 '일상적 대화'라는 인간적 접촉이 사라진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오늘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 욕망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보여준다.
그것은 지금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우리가 추구하는 '이익'이 우리 자신에게 궁극적으로도 유리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이다.
우리의 일과 삶이 얼마나 '경제적인가'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가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영속적이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양적 성장주의에 대한 반성과 인간 중심의 경제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무엇보다 실천이 중요할 것인데 상호적 실천이 가능한 규모가 지금보다 작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규모의 적절성은 가능한 한 소통의 규모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공존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규모에서 찾음으로써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찾았다.
질서와 자유가 공존할 수 있는 크기,'작은 것'은 '큰 것'보다 더 쉽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 김현승 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