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용어 가운데에는 자연과학에서 차용한 것들이 많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탄력성 개념이다.

물리학에 나오는 탄성의 개념을 '가격변화에 따른 수요변화 정도'를 측정하는 데 활용한 개념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다.

또 다른 예 가운데 하나가 다소 생소하긴 하지만 히스테리시스(Hysteresis)이다.

히스테리시스란 이력(履歷)현상이라는 조금 어려운 한자말로 번역되는 용어로,사전적 의미는 어떤 물리량(物理量)이 그때의 물리조건만으로 일의적으로 결정되지 않고,그 이전에 그 물질이 경과해 온 상태의 변화과정에 의존하는 현상을 말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외부적인 힘에 의한 어떤 물체의 성질이 변화되었을 때,변화의 원인이 제거됐음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쇠붙이에 자기장을 가해 자성을 띠도록 만들었을 때,자기장을 제거해도 쇠붙이는 여전히 자성을 띠고 있는 것이 예가 될 수 있다.

히스테리시스가 경제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유럽의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경기침체로 실업률이 높아졌다가,경기회복으로 높은 실업률의 원인이 사라졌는데도 실업률이 다시 낮아지지 않았던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83년 이후 유럽의 실업률은 90년의 8.1%가 최저치였고 85년에는 10.4%로 가장 높았다.

73년부터 92년까지의 평균 실업률이 5.2%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80년대 유럽의 실업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머물러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경기회복과 함께 실업률도 낮아질 것으로 보았던 경제학자들은 당황했다.

경기침체기에 높아졌던 실업률이 경기가 회복됐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상태로 장기간 지속됐던 것이다.

이를 해명하기 위한 설명 가운데 하나로 실업에 히스테리시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제시됐다.

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대량의 실업이 발생한 이후 이들이 어떤 이유로 인해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다시 취업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대개 두 가지 정도가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실업자들이 장기간의 실업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인적자본에 손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전의 임금 수준에서도 고용되지 못할 뿐 아니라,자신들이 요구하는 임금을 낮춘다 하더라도 고용되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적자본의 손상으로 재취업이 불가능해졌다고 본다.

이 같은 현상은 기술숙련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기술의 내용도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의 경제에서 더욱 심해진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고용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인사이더)이 고용주와의 협상과정에서 자신들의 고용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실업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아웃사이더)의 취업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사이더들은 임금이 높은 상태에서 유지되도록 협상을 하고,따라서 고용주는 임금을 낮춰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안을 선택하지 못한다.

실업에 있어서 히스테리시스의 가설을 내세우는 경제학자들은 장기균형으로서의 이른바 자연실업률이라는 것의 존재를 부정한다.

자연실업률이란 경제가 이용가능한 모든 자원을 다 써서 생산했을 때,장기균형으로서 존재하는 실업률을 말한다.

이는 현재 경제의 균형상태에 따라 실업률이 좌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현재의 실업이 균형과는 무관하게,과거에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가 하는 역사 또는 이력(履歷)에 좌우되는 경로의존적인(path dependent)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업에 이 같은 이력현상이 존재하는 한,실업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더 이상 단순히 경기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가 IT분야를 중심으로 재취업훈련 프로그램에 대해 국고를 보조해 주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실업에 있어서의 이력현상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의 하나인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