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8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징시호텔.이곳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중앙위원회의 전체 회의(16기 5중 전회)가 열렸다.
우리나라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중앙위원회 회의에는 국내 언론조차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중국의 중앙위원회 회의에 전세계 언론들이 이목을 집중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의 국가운영 체계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이 경제개발과 개혁 정책을 계속 추진해 왔는데도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1당체제를 유지하고 있고,모든 중요한 결정들은 공산당에서 나오고 있다.
경제개발을 포함한 주요 사안들을 좌지우지하는 중국 공산당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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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권력과 정책결정구조를 이해하려면 중국공산당을 지배한 사람들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래 중국 헌법이 보장한 최고 권력자는 당총서기 아니면 국가주석(1982년 헌법개정 전에는 중앙위원장)이었다.
하지만 헌법과 실제는 달랐다.
예를 들면 덩샤오핑(鄧小平)은 군사위원회 주석 직함만 가지고 1989년 장쩌민(江澤民)에게 권력을 물려줄 때까지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지금도 헌법에는 국가주석이 나라를 대표한다고 돼 있으나 실질 권력은 당총서기에게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 중국에는 국가주석(또는 중앙위원장)이 8명,당총서기가 12명 있었지만 이 십수명이 다 중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 사학자들은 누가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는가를 토대로 중국의 역대 지도자를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胡錦濤) 등 4세대로 나눈다.
◆중국공산당 1세대는 혁명세대
마오쩌둥,주더(朱德),저우언라이(周恩來)로 대표되는 중국 공산당 1세대는 천지를 개벽하고 천하를 얻은 인중호걸들이다.
이들은 중국 역사에 정통하고 시와 서문에 모두 능했으며 배포가 크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1대 중앙위원장이었던 마오쩌둥(1893~1976)의 업적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인민해방군을 창건하고 강력한 국방을 건설,강대국의 식민지로 유린당하던 중국을 독립시킨 것이다.
하지만 수요 공급 원리에 무지했던 마오쩌둥은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앞지르자'면서 과대망상적 농업생산 증대 목표를 설정하고 배급을 먼저 실시함으로써 수천만명의 중국 농민을 아사로 몰고 갔다.
바로 중국의 제2차 경제계획이었던 대약진운동(1958~1960)이었다.
이후 중공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선언하고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의 수정노선을 채택했다.
이는 권력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 마오쩌둥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고도의 숙청 전술을 고안하게 된다.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마오 동지를 만나러 가자'는 슬로건을 유행시켰다.
이로 인해 중국의 전통문화와 도덕윤리는 하루아침에 말살됐다.
바로 홍위병과 문화혁명(1966∼1969)시기였다.
◆실용주의자들의 득세
덩샤오핑,천윈(陣雲),리셴녠(李先念)으로 대표되는 중공 제2세대는 사실 1세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중 중심 인물인 덩샤오핑(1904∼1997)은 무한한 인내와 명석한 두뇌로 적대세력과 타협하며 최고 권력을 쟁취한 현실주의자다.
그의 인생은 부침으로 가득했다.
공산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가하고 중앙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경제발전을 위해 보상제도를 채택하고,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다 문화혁명 때 홍위병으로부터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실각당했다.
덩샤오핑은 1973년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국무원 부총리로 복권됐다가 3년 후 저우언라이가 사망하면서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에 의해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가 다시 복직된 것은 마오쩌둥 사망 후 정권을 잡은 총리 화궈펑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화궈펑과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으나 끝까지 당내 최고 원로였던 천윈의 감시와 견제를 받았다.
덩샤오핑의 최대 업적은 개혁 개방정책(1978년)을 통해 선전 등 5개 경제특구를 차례로 지정하고 외국 자본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 경제를 성장 궤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유행시켰다.
◆제한된 권력을 행사한 장쩌민
제3대 지도부의 중심 인물은 장쩌민,리펑(李鵬),주룽지(朱鎔基)다.
이들은 공산 혁명이 끝난 후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고 대체로 구 소련에서 유학한 세대다.
중심 인물인 장쩌민(1926~)이 최고 권좌에 오른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최고 권력을 갖게 될 것으로 상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당 서기 자오쯔양이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한 톈안먼 광장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실각했을 때,덩샤오핑과 천윈은 후임자가 급히 필요했다.
이 둘은 서로를 견제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더 많은 권한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 당내 입지가 거의 없고 경제 개발의 중심지였던 상하이시에서 당서기를 지낸 장쩌민을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장쩌민은 이렇게 해서 1989년 당총서기로 선출된 후 정치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주룽지 총리를 비롯한 상하이 출신을 잇따라 요직에 진출시켰고,이후 상하이 출신 권력 집단인 상하이방(上海幇)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장쩌민의 권위는 덩샤오핑이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제한적이었다.
장쩌민은 하지만 유능한 경제 관료인 주룽지와 함께 상하이 푸둥지구를 포함한 중남부 연안을 집중 개발함으로써 중국을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시켰다.
◆후진타오 등장은 '완전한 세대교체'의 상징
후진타오,원자바오(溫家寶),쩡칭훙(曾慶紅)을 대표로 하는 제4대 지도부는 기술 관료이자 풀뿌리 세대다.
역대 중공 지도부 중 유일하게 해외 유학 경험이 없고 대부분 엔지니어 출신이며,국공 내전 때 태어나 반혁명진압운동,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등 잇단 정치적 풍랑을 체험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앞선 세대와 비교해 자기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뚜렷하지만 대신 근면 성실하고 군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제4대 지도부는 중국의 역대 지도부 중 유일하게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따른다.
중국 사학자들은 이런 이유로 "중국 정치계는 4세대에 와서야 완전한 세대 교체가 이뤄졌다"고 말한다.
정지영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cool@hankyung.com
우리나라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중앙위원회 회의에는 국내 언론조차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중국의 중앙위원회 회의에 전세계 언론들이 이목을 집중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의 국가운영 체계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이 경제개발과 개혁 정책을 계속 추진해 왔는데도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 1당체제를 유지하고 있고,모든 중요한 결정들은 공산당에서 나오고 있다.
경제개발을 포함한 주요 사안들을 좌지우지하는 중국 공산당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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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권력과 정책결정구조를 이해하려면 중국공산당을 지배한 사람들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래 중국 헌법이 보장한 최고 권력자는 당총서기 아니면 국가주석(1982년 헌법개정 전에는 중앙위원장)이었다.
하지만 헌법과 실제는 달랐다.
예를 들면 덩샤오핑(鄧小平)은 군사위원회 주석 직함만 가지고 1989년 장쩌민(江澤民)에게 권력을 물려줄 때까지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지금도 헌법에는 국가주석이 나라를 대표한다고 돼 있으나 실질 권력은 당총서기에게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 중국에는 국가주석(또는 중앙위원장)이 8명,당총서기가 12명 있었지만 이 십수명이 다 중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 사학자들은 누가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는가를 토대로 중국의 역대 지도자를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胡錦濤) 등 4세대로 나눈다.
◆중국공산당 1세대는 혁명세대
마오쩌둥,주더(朱德),저우언라이(周恩來)로 대표되는 중국 공산당 1세대는 천지를 개벽하고 천하를 얻은 인중호걸들이다.
이들은 중국 역사에 정통하고 시와 서문에 모두 능했으며 배포가 크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1대 중앙위원장이었던 마오쩌둥(1893~1976)의 업적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인민해방군을 창건하고 강력한 국방을 건설,강대국의 식민지로 유린당하던 중국을 독립시킨 것이다.
하지만 수요 공급 원리에 무지했던 마오쩌둥은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앞지르자'면서 과대망상적 농업생산 증대 목표를 설정하고 배급을 먼저 실시함으로써 수천만명의 중국 농민을 아사로 몰고 갔다.
바로 중국의 제2차 경제계획이었던 대약진운동(1958~1960)이었다.
이후 중공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선언하고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의 수정노선을 채택했다.
이는 권력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 마오쩌둥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고도의 숙청 전술을 고안하게 된다.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마오 동지를 만나러 가자'는 슬로건을 유행시켰다.
이로 인해 중국의 전통문화와 도덕윤리는 하루아침에 말살됐다.
바로 홍위병과 문화혁명(1966∼1969)시기였다.
◆실용주의자들의 득세
덩샤오핑,천윈(陣雲),리셴녠(李先念)으로 대표되는 중공 제2세대는 사실 1세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중 중심 인물인 덩샤오핑(1904∼1997)은 무한한 인내와 명석한 두뇌로 적대세력과 타협하며 최고 권력을 쟁취한 현실주의자다.
그의 인생은 부침으로 가득했다.
공산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가하고 중앙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경제발전을 위해 보상제도를 채택하고,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다 문화혁명 때 홍위병으로부터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실각당했다.
덩샤오핑은 1973년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국무원 부총리로 복권됐다가 3년 후 저우언라이가 사망하면서 마오쩌둥의 추종자인 4인방에 의해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그가 다시 복직된 것은 마오쩌둥 사망 후 정권을 잡은 총리 화궈펑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화궈펑과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으나 끝까지 당내 최고 원로였던 천윈의 감시와 견제를 받았다.
덩샤오핑의 최대 업적은 개혁 개방정책(1978년)을 통해 선전 등 5개 경제특구를 차례로 지정하고 외국 자본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 경제를 성장 궤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유행시켰다.
◆제한된 권력을 행사한 장쩌민
제3대 지도부의 중심 인물은 장쩌민,리펑(李鵬),주룽지(朱鎔基)다.
이들은 공산 혁명이 끝난 후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고 대체로 구 소련에서 유학한 세대다.
중심 인물인 장쩌민(1926~)이 최고 권좌에 오른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최고 권력을 갖게 될 것으로 상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당 서기 자오쯔양이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한 톈안먼 광장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실각했을 때,덩샤오핑과 천윈은 후임자가 급히 필요했다.
이 둘은 서로를 견제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더 많은 권한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 당내 입지가 거의 없고 경제 개발의 중심지였던 상하이시에서 당서기를 지낸 장쩌민을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장쩌민은 이렇게 해서 1989년 당총서기로 선출된 후 정치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주룽지 총리를 비롯한 상하이 출신을 잇따라 요직에 진출시켰고,이후 상하이 출신 권력 집단인 상하이방(上海幇)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장쩌민의 권위는 덩샤오핑이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제한적이었다.
장쩌민은 하지만 유능한 경제 관료인 주룽지와 함께 상하이 푸둥지구를 포함한 중남부 연안을 집중 개발함으로써 중국을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시켰다.
◆후진타오 등장은 '완전한 세대교체'의 상징
후진타오,원자바오(溫家寶),쩡칭훙(曾慶紅)을 대표로 하는 제4대 지도부는 기술 관료이자 풀뿌리 세대다.
역대 중공 지도부 중 유일하게 해외 유학 경험이 없고 대부분 엔지니어 출신이며,국공 내전 때 태어나 반혁명진압운동,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등 잇단 정치적 풍랑을 체험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앞선 세대와 비교해 자기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뚜렷하지만 대신 근면 성실하고 군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제4대 지도부는 중국의 역대 지도부 중 유일하게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따른다.
중국 사학자들은 이런 이유로 "중국 정치계는 4세대에 와서야 완전한 세대 교체가 이뤄졌다"고 말한다.
정지영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