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3월9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왕가(家) 한 사람의 부고기사를 다룬다.

'久(히사:사람 이름) 宮樣(왕족을 일컬음)의 죽음을 맞아 왕과 왕비께서 조문하시다'란 내용이었다.

그런데 신문에는 엉뚱하게 '久 宮樣와 왕비의 죽음을 맞아…'식으로 나왔다.

제작 과정에서 일부가 실수로 잘려나간 것이다.

멀쩡한 사람을,그것도 존엄하기 그지없는 왕비가 죽었다고 했으니 아사히신문이 초상집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른바 왕실기사 오식(誤植)사건이다.

아사히신문은 이후 교정(校正) 과정을 질적·양적으로 강화해 편집에서 분리된 새로운 독립 부서를 설치했는데,이것이 최초의 '교열부'다.

일본의 편제를 그대로 들여온 우리나라 신문에선 대략 1920년대 말쯤에 '교정부'가 생겨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교열부'로의 명칭 변경이 이뤄졌다(지금은 기사심사부 또는 어문연구팀이라고도 한다).신문과 독자 사이에 우리말글과 관련해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교열부다.

지난주엔 제559돌 한글날이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에선 올해도 연례행사처럼 우리말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대개는 외래어 남용이나 우리말 오용 실태를 지적하는 내용들이다.

신문이 우리말을 바루고 살찌우기 위해 애쓴 역사는(신문 방송이야말로 우리말 파괴의 주범이란 비판도 일부 있지만) 독립신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96년 4월7일 창간한 독립신문은 여러 면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

우선 신문으로선 처음으로 한글 전용과 띄어쓰기를 도입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더구나 창간호 1면에서 창간사의 절반을 할애해 이런 방침을 자세히 밝힌 데서 당시 독립신문이 우리말의 중요성을 얼마나 철저히 깨닫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독립신문에선 또 4편의 국어 관련 사설을 다루고 있는데,그 중 두 편은 주시경 선생이 쓴 것이다.

우리 글자에 '한글'이란 이름을 붙이고 우리말의 터전을 닦은 그가 최초의 교열기자였다는 사실도 주목해볼 만하다.

주시경의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배재학당 학생이던 그는 독립신문의 창간작업에 참여하면서 교보원을 맡았다.

당시 사장 겸 주필이었던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그를 '언문조필'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편집기자 겸 교열기자였던 셈이다.

한국 언론의 태동기를 형성하던,문자로선 여전히 한자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당시에 독립신문이 혁신적인 기사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교열기자' 주시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다.

독립신문은 100년도 더 된 우리말글의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보고다.

당시 러시아를 '아라샤'라고 적는 등 표기의 변천을 따라가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물론 생활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재미는 당연한 덤이다.

영인본(LG상남언론재단,1996년)이 나와 있으므로 웬만한 도서관에는 비치돼 있을 것이다.

우리말을 생각하면서 이 가을에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