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재화는 배타적으로 사용되고 그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재화를 우리는 사적재화(private goods)라고 한다.

그러나 '국방'이나 '가로등의 불빛'과 같은 재화는 모든 사람이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으므로 배타성도 경쟁성도 없다. 다시 말해 일단 공급이 되면 그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경쟁할 필요도 없고,한 사람이 그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이용에 제약이 가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재화를 공공재(public goods)라고 한다.

공공재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이른바 무임승차자의 문제(free rider's problem)를 야기한다. 공공재가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공공재를 공급하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공재를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제외되지도 않는다.

마을 진입로의 길이 어둡고 험해서 주민들이 돈을 모아 가로등을 세우려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주민들 중 한 집이 빠진다고 해도 나머지 가구가 가로등을 세운다면 돈을 내지 않은 집도 가로등의 혜택을 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과연 어떤 가구에서 가로등을 세우는데 돈을 내겠는가.

서로 다른 사람의 눈치만 본다면 가로등의 불빛이라는 재화는 공급될 수 없다. 이것이 재화의 공공재적 성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장의 실패다.

따라서 합리적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사적 재화와는 달리,배타성도 경쟁성도 없는 공공재의 경우에는 정부가 공급을 맡게 된다. 그렇다면 공공재의 공급량은 어떻게 결정될까. 그 공급량을 얼마로 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투표에 의한 방법이다.

그런데 투표에 의해 공공재의 공급량을 정할 경우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균형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른바 투표의 역설(voting paradox)이 존재한다.

투표를 통해 공공재의 공급량을 결정할 경우,균형이란 어떤 수준의 공공재에 대해 더 많거나 더 적은 양의 공공재를 바라는 다수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즉 다수가 어떤 특정한 수준의 공공재의 공급을 바라는 경우,공공재는 그 수준 만큼 공급되고 이를 균형으로 본다는 것이다.

균형을 이같이 정의하면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갑·을·병이라는 세 사람이 1,2,3안에 따라 (예를 들어 서로 다른 규모의) 공공재를 공급하는 방법을 놓고 투표를 한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갑은 1안보다는 2안을,2안보다는 3안을 좋아하고(1<2<3),을은 2안보다는 3안을,3안보다는 1안을 좋아하고(2<3<1),병은 3안보다는 1안,1안보다는 2안을 좋아한다(3<1<2).

이런 경우 정부에서 어떤 안을 내놓고 투표를 해도 항상 다른 방안에 따른 공공재의 공급을 선호하는 사람이 다수가 된다. 예를 들어 1안과 2안을 놓고 투표를 할 경우,갑과 병은 2안을,을은 1안을 좋아한다. 또 2안과 3안을 놓고 투표하면 갑과 을은 3안을,병은 2안을 좋아한다.

마지막으로 1안과 3안을 놓고 투표하면 을과 병은 1안을,갑은 3안을 좋아한다. 결국 1안에 대해서는 2안이 다수이고,2안에 대해서는 3안이 다수이며,3안에 대해서는 1안이 다수가 되므로 어떤 안에 대해서도 그 안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다수가 된다. 이것이 이른바 투표의 역설이다.

투표의 역설은 정부가 공공재를 공급하는 경우에도 정책선택에 있어서 불안정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장실패가 정부실패로 이어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투표의 역설이 존재하면 정부는 원하는 결과를 위해 투표과정을 조작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2안을 원하면 1안과 3안을 먼저 투표하고,채택된 1안과 2안을 투표에 부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안을 대상으로 투표한 것으로 인식되면서도 2안이 채택될 수 있다. (투표에 부치는 조합의 순서가 바뀌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확인해 보자.) 경제문제와 관련된 민주화는 다수결의 원리만 가지고는 부족한,그래서 더욱 어려운 문제인가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