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고전읽기] 미셸 푸코, '지식인의 정치적 기능' 중에서

오랫동안 지식인은 진리와 정의를 주관하는 자로서 발언하였으며,그 권위를 인정받아 왔다.


사람들은 보편적 진리의 대변인으로서 지식인에게 귀기울였다.


지식인은 모든 사람의 의식과 양심의 지표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식인은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역할을 할 것을 요구받지 않는다.


지식인은 보편,모범,모든 이들을 위한 진리와 정의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직업적인 근로 조건 또는 삶의 조건이 처한 구체적인 장에서 일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더욱 생생한 현실 의식을 얻게 되었고 구체적이고 비보편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족 주택 보건 남녀관계 등의 실질적인 일상생활에 얽혀 있는 문제들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지식인의 기능을 재고해야 할 단계에 이른 듯하다.


위대한 보편적 지식인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이 아직 남아 있다 할지라도 지식인의 기능은 재정의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구체적' 지식인이 핵과학자 유전공학자 자료처리전문가 약물학자 등의 신분으로 싫든 좋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책임이 증대함에 따라 그들의 역할 또한 더욱 중요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 지식인이 특수 영역에서 맺게 되는 권력 관계를 두고 그것이 전문가들만의 소관사일 뿐 일반 대중의 이해와는 무관하다는 구실 아래 그들을 정치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또 이들 지식인이 개인적 이데올로기를 퍼뜨린다는 구실로 그들을 비난하기도 하는데 지식인이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며 사실 그들이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려 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진정한 담론의 효과라는 근본적인 것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란 권력 밖에 존재하는 것도,진리에서 권력이 배제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진리는 세상에 속한 것이다.


진리는 여러 제약 조건들을 통하여 생산된다.


각 사회는 그 나름의 진리 체제,'일반적 정치 체계'를 갖는다.


각 사회가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담론의 방식,참된 진술과 거짓 진술을 구분하는 기제(機制,메커니즘)와 사례들,진리를 얻기 위하여 공인된 기술과 절차들,무엇이 진리로 간주되는가를 말하는 책임을 지는 사람들의 지위 등이 이런 정치 체계를 구성한다.


우리 사회에서 보이는 진리의 정치경제학은 다섯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진리는 과학적 담론의 형식과 그 형식을 생산하는 제도에 맞추어져 있다.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생산을 위해 진리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진리는 지속적인 정치적,경제적 동기에 의해 성립한다.


진리는 사회 전체 내에 널리 퍼져 있는 다양한 형식을 통해 대규모로 확산되고 소비되는 대상이다.


진리는 대학 군대 출판 대중매체 등 몇몇 거대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장치들의 지배 아래서 생산되고 전파된다.


마지막으로 진리는 전반적인 정치적 논쟁과 사회적 갈등의 결말을 판가름하는 관건이다.


요컨대 진리 체제는 우리 사회의 구조 및 기능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지식인은 이 가운데서 작업하고 싸우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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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제는 2001년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가 개최한 제2회 전국 고교생 논리·논술 경시대회에 출제된 제시문이다.


글의 요지를 쓰는 것은 주어진 글을 정확하게 독해한 흔적을 간결한 자기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지에 대한 평가다.


제목을 다는 것도 평가의 대상인데,스스로 쓰는 글에 담긴 메시지를 짧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견해쓰기는 객관적인 독해능력에 근거해 종합적이며 창의적인 사고력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평가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창의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 해야 한다.


질문 속에는 이미 답변의 방향과 그 내용까지도 제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같이 검토할 위의 논제는 바로 그 점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시문의 필자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다른 질문방식을 통해 새로운 결론에 이르고 있다.


제시문의 필자가 어떤 문법으로 대상에 접근하고 있는지,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미셸 푸코는 질문을 대놓고 하지 않고 주장과 근거를 담담히 개진하고 있다.


답변만이 존재하는 제시문을 통해서 제시문의 필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재구성하고,이를 통해 다시 우리는 질문이 무엇이었을지 파악해야 한다.


제시문의 필자는 말한다.


"진리체제는 우리 사회의 구조 및 기능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지식인은 이 가운데서 작업하고 싸우는 존재"라고.


그렇다면 이 답변을 이끌어낸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진리(지식인)란 무엇인가?(What is truth?)'를 상상했다면 유감스럽게도 그건 잘못 짚은 것이다.


제시문의 필자는 어디서도 진리의 구체적인 내용을 적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그 명징한 근거가 된다.


오히려 그는 진리가 "여러 제약조건을 통하여 생산된다"는 주장을 통해 특정한 '진리'가 '진리'로서 대접받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실상 제시문의 필자가 가진 문제의식은 진리가 무엇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는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그 진리를 진리이게 하는 '힘(power, 권력)'이 무엇인지를 의문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가 했던 질문은 차라리 '누구를 위한(For whom) 진리(지식인)인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특정한 초월적 진리가 존재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제약조건과 나름의 진리체계,혹은 일반적 정치체계라고 하는 주어진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담론적 질서와 제도 안에서 특정한 지식이 진리 행세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그가 만일 진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면 진리는 '이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했겠지만 그는 그런 '진리'는 있지도,있을 수도 없다고 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그의 주장은 특정한 힘(권력)이 작동하는 장(場) 위에서 복수(複數)의 지식들이 경쟁하고 있으며,지식인은 그 가운데서 싸우는 존재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자,만일 여러분이 이런 과정을 통해 제시문의 필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여러분의 견해를 제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써야 하는 견해는 제시문 필자의 견해에 대한 의견이라는 점을 재삼 확인해두기로 하자.


여기서 제출될 수 있는 여러분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제시문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경우이고,다른 하나는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나아가는 경우다.


만일 제시문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을 전제로 글을 쓰게 된다면 초월적 혹은 보편적 진리를 내세워 나머지 힘을 결여하고 있는 지식들을 억압하는 상황을 사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특권적인 진리의 기능을 비판하면서 지식인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과정에서 진리로 행세했던 과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며,반공을 유일한 진리로 삼았던 과거 한국의 독재정권에서 벌어진 폭력과 억압을 사례로 드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떠한 지식도 그 특권의 세례를 받는 순간 폭력화될 수 있음을 경계하면서 지식인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싸움의 장에서 비판의 역할을 하는 자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제시문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가령 제시문에 언급되어 있는 바,보편적 진리의 대변자로서의 과거 지식인의 기능과 특징이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함을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 제시문의 견해가 일정하게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만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보편적 진리의 가치를 부정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누구라도 모두 옳은 극단적 상대주의에 빠지게 됨을 경계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보편적 주체'로서 '계급장을 뗀' 인간을 상정하고,누구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가치의 존재를 긍정함을 통해서 지식인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는 자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김원기 초암논술아카데미 선임연구원 closely@naver.com


[ 약력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 철학과 석사


△(현)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구술 강사


△<대중문화 속 과학읽기> <포스트모더니즘과 유대인 대학살의 부인> 등 다수 교양서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