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비타민이나 비닐은 바이타민,바이닐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또 집에서 쓰는 부탄이나 프로판가스 같은 말은 뷰테인,프로페인가스로 바뀌게 됩니다.

교과서도 내년부터 바꿔나갈 예정입니다."

어느 국어단체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 어문 관련 부처 쪽 얘기도 아니다.

출처는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기술표준원은 우리가 잘 아는 KS(Korean Standard),즉 국가 산업규격을 관장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왜 우리말을?

그것은 국가 산업기준을 정하는 일에 필연적으로 산업 용어에 대한 규정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최근 이곳에서 우리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용어들을 개정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지난 4월6일자로 비닐 등 화학 용어를 국제 표기법에 맞춰 바꾼 것을 비롯해 색 이름,장례 용어를 잇달아 새로 제시했다.

색 이름에선 인종차별 논란이 있던 살색을 살구색으로 바꾸고 잘 쓰지 않는 국방색을 버렸는가 하면,장례 용어에선 일본식인 납골당을 봉안당으로 바꾼 게 대표적이다.

물론 급격한 변화에 따른 혼란을 막기 위해 당분간 그대로 쓰거나 병행해 쓰게 하는 등 완충 과정을 거치게 했다.

하지만 산업적 측면에서 우리말을 다루다 보니 때로 일부 용어는 국어학적,언어학적 차원에서 기존 우리말 체계와 충돌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화학 용어를 새로 정한 취지는 한마디로 독일어식 라틴어식 일본어식 등으로 혼재돼 있는 기존 명칭을 미국식으로 통일한다는 것.여기에다 '대학에서는 주로 영어로 공부하는데 현재 고교에서 배우는 용어와는 연결이 잘 안 된다.

그래서 비효율적이다'라는 논리가 덧붙여졌다.

문제는 이런 인식이 자칫 현행 외래어표기법의 원음주의 정신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화학용어 등의 전문어도 상위 규범인 외래어표기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더구나 학술어는 대개 라틴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굳어져 온 말인데 이를 굳이 영어식으로 바꾼 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몇 해 전 한 신문에서 독일어에 어원을 둔 '게놈(genom·생물염색체)' 표기를 영어식 표기인 '지놈'으로 쓰겠다고 고집했을 때의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는 점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당시에도 '게놈-지놈' 논쟁은 국어심의회에까지 올라가 '지놈'이 판정패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화학 용어의 개정은 산자부에서 발표했지만 내용적으론 대한화학회의 주장이 반영된 결과다.

물론 수년간의 준비 작업을 하면서 국어 및 언론 단체의 견해를 수렴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반대 의견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찌됐건 개정돼 이미 공표된 만큼 이제 규범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 일이 과제로 남았다.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 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