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고전읽기]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논하라

종교나 과학의 두 사상 영역의 어느 쪽도 여러 가지 것들이 추가되고 배제되고 수정돼 왔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1000년 내지 1500년 전에 이루어지던 것과 같은 주장이 제기된다고 해도, 그 주장은 이전의 시대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의 제한 또는 확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명제는 그것이 참 아니면 거짓 둘 중의 하나이지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명제가 중요한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해도,그것이 지금으로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제약이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일반 지식 구조의 특징을 들어 말한다면,우리가 비록 여러 가지 중요한 진리를 끈질기게 고수하고 있지만 이 진리를 뒷받침하는 정식(定式)들은 언젠가는 수정을 받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과학에서 두 개의 예를 들어보자.


갈릴레이는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단자 심문소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태양이 움직인다고 했다.


또 뉴튼파의 천문학자는 절대 공간설을 채택하여 태양도 지구도 모두 움직인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정지'와 '운동'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 세 언명에 맞게 조정시킨다면 이 모든 언명은 다같이 참이라고 할 수 있다.


갈릴레이가 이단자 심문소에서 논쟁을 일으켰던 당시에,갈릴레이가 사실을 진술했던 방식은 의심할 나위 없이 과학 연구를 위해서는 풍부한 결실을 보장하는 방법이었다.


다만 이단자 심문소 측의 입장에서 보는 진리가 그의 것과 같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상대적 운동에 관한 현대적인 사고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양쪽의 언명은 다 같이 더 완전한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지구와 태양의 운동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다 같이 우주의 진정한 사실을 표명하였고, 또 둘 다 이 사실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그 당시의 지식 수준으로는 그들의 진리가 양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현대 물리학에서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다.


17세기 뉴튼과 호이겐스 이래로 빛의 물리적 성질에 관해 두 개의 학설이 있었다.


뉴튼의 학설에 의하면 광선은 극히 작은 입자,즉 미립자의 흐름으로 성립되며 이들 입자가 눈의 망막에 부딪칠 때 빛을 느끼게 된다.


한편 호이겐스의 학설에 의하면 빛은 공간 전체에 퍼져 있는 에테르 속의 극히 작은 진동파로 성립되며 이들 광파가 광선의 진행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두 개의 학설은 서로 모순된다.


18세기에는 뉴튼의 학설이,19세기에는 호이겐스설이 신봉되었다.


오늘날에는 어떤 현상들은 오로지 파동설에 의해서만 설명되고, 다른 현상들은 오로지 입자설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과학자는 이러한 현상을 방치한 채,두 가지 이론을 조화시키는 더 폭넓은 시야를 얻게 될 날을 기대하면서 미래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원칙을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 발생되는 여러 문제에도 적용시켜야 한다.


우리는 어느 쪽의 사상 영역도 우리 자신의,또는 유력한 권위자의 비판적 연구를 근거로 하는 확고한 이유에서,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신중한 자세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양자가 중복되는 세부 문제를 놓고 충돌할 때는 우리의 확고한 증거를 갖는 주장까지도 버려서는 안된다.


두 주장 가운데 어느 한 쪽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폭넓은 사상사적 관점에서 전망하는 감각의 소유자라면 조용히 기다려야지 섣불리 저주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피동적으로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든지 또는 자포자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충돌이 있다는 것은 곧 종교가 한층 심화되고 과학이 더욱 정밀화되어 거기서 화해될 수 있는 보다 폭넓은 진리와 보다 좋은 전망을 오래지 않아 얻을 수 있다는 조짐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과학과 종교의 싸움은 본디 사소한 것이었는데 부당하게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단순히 논리적 모순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양쪽에 약간의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서로 다른 면을 과학과 종교가 각각 다루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과학이 자연 현상을 규제하는 보편적 조건들에 관여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도덕적 미적 가치의 통찰에 전념한다.


전자에는 중력의 법칙이 있으며,후자에는 신성함의 아름다움에 대한 통찰이 있다.


저마다 한쪽이 보는 것을 다른 쪽은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


종교와 과학은 서구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기둥은 담쟁이덩굴처럼 복잡하게 엉켜 왔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사와 문명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가 왜 문제가 되는지 살펴본 뒤, 저자의 생각을 검토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자.


◆종교와 과학,때론 친하게 때론 앙숙으로


오늘날 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의 논쟁이다.


근본주의 기독교적 성향이 매우 강한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온 문제다.


창조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과학의 오만한 제국주의가 인간의 영성에까지 침입하고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볼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라면 이러한 논쟁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신앙이 오류를 범한 갈릴레이 재판의 또 다른 판본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


주로 종교 쪽에서 과학에 보내는 일방적인 구애가 많다는 것은 과학은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을 만큼 확고한 토대를 확보한 듯 보이는 반면 종교는 비과학적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아야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계열의 대표적인 잡지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주요한 주장은 기독교의 기적이 과학적으로도 증명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과학의 이름을 쓴 종교도 생겨나고 있기도 하다.


사이언톨로지라는 이름의 종교,라엘리안 무브먼트라는 이름의 외계인 숭배집단은 과학문명에 대한 신뢰가 영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이 새로운 종교가 되고 있다는 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관점부터 이미 자신의 가치관이 반영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1)과학기술문명 시대에 위축된 정신적 삶의 황폐화가 만들어낸 문제라고 보는 관점과 (2)2000년 전 유목민 시대에 만들어진 종교가 오늘날의 과학기술문명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라고 보는 관점은 출발점부터 다른 것이다.


◆종교와 과학,그 올바른 관계는?


화이트헤드는 과학에 대한 맹신을 경계하고 종교의 영역을 지키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는 과학사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왜 진리에 대해 독선적인 태도를 취하면 안되는가를 설명한다.


그래서 그가 취하는 대안은 (1)종교와 과학이 서로 구별되는 영역이며, (2)우리가 아직 그 통합의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3)관용의 자세로 기다리자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 동조하는 입장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논지를 확대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은 논지들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진리의 속성(개방성, 미완결성, 잠정성)에 대한 언급을 토대로 해서 과학과 종교가 어떤 방식으로 진리에 관여하는지를 논하고,종교와 과학 사이의 충돌(외견상의 모순)과 화해(내적인 분리와 조화)가 어떻게 동시에 존재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와 자신이 내세우는 현명한 태도가 어떻게 오늘날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만일 저자의 관점과 입장을 달리한다면,혹은 대체로 동의하지만 강조점을 달리하려고 한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겠다.


한 가지는 종교의 영역을 보호하면서 과학의 오만함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전개하는 것이고,다른 한 가지는 과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며 종교의 '제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과학은 문명사적으로 볼 때 그 기계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속성으로 인해 정신적 삶의 가치를 경시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러나 과학이 윤리적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종교는 인간의 삶에 가치를 부여해주는 원천 중 하나이다.


따라서 종교는 예술 문화 도덕 윤리 등과 뗄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이러한 풍부한 정신적 삶을 파괴하면 안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입장에서 보면 종교는 늘 끊임없이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적인 사고를 위협해왔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에 반대하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종교와 과학 사이의 근본적인 문제다.


종교는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한다.


그것이 오늘날 종교와 과학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전개할 수 있는 입장이 크게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논점,통찰력 있는 사례 제시와 설득력 있는 전개 등 기본기가 중요한 논제다.


김원기 초암논술아카데미 선임연구원 closely@naver.com


[ 약력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 철학과 석사


△(현)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구술 강사


△<대중문화 속 과학읽기> <포스트모더니즘과 유대인 대학살의 부인> 등 다수 교양서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