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투자 전파한 월가 교장선생님 .. 가치투자 원조 '벤저민 그레이엄'

"낮게 평가된 주식을 싸게 사서 보유하고 있다가 가격이 오르면 판다."


주식투자에서 돈을 버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그러나 '가치투자'라고 일컬어지는 이 원리가 실제 주식시장에서 체계적으로 적용된 것은 1930년대 벤저민 그레이엄이라는 석학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1930년대 초 미국의 주식시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1929년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미국 기업들의 주식가치는 3년 만에 89%나 폭락했다.


미국 최대의 기업인 제너럴일렉트릭(GE)은 주당 400달러에서 13달러까지 하락했다.


US스틸은 292달러에서 21달러까지 주저앉았다.


투자자들은 풍문에 따라 주식을 사고 팔았다.


주식을 산 뒤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퍼뜨려 주가를 올린 뒤 적당히 올랐다고 생각되면 주식을 파는 방식이었다.


그레이엄은 주먹구구식이었던 주식투자에 계량적 방식을 도입했다.


그는 기업의 재무제표와 손익계산서를 분석해 기업의 가치를 평가했으며 증권시장에서 이 투자방식을 실천했다.


그는 펀드매니저로 성공했지만 가치투자를 역설한 두 권의 책 '증권분석'(1934)과 '현명한 투자자'(1949)로 더 유명하다.


그래서 그의 별명도 월스트리트의 교장선생님(Dean of Wall Street)이다.



◆가치투자의 원조(진짜 원조예요!)


그레이엄이 저술한 '증권분석'과 '현명한 투자자'는 월스트리트에서 투자의 바이블로 통한다.


세계 최고의 주식투자자인 워런 버핏은 '증권분석'을 10번 이상 읽지 않고서는 절대 주식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다.


그레이엄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실속 있는 기업의 주식,재정적으로 튼튼한 유명회사의 주식 중에서 가격이 가치보다 낮은 주식을 주로 샀다.


또 가능한 한 손실을 막기 위해 100여개의 다른 주식을 매입(포트폴리오 투자라고 함)했다.


그는 주식을 사고서도 매일 시세표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기업의 가치가 시시각각으로 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레이엄은 저평가된 주식을 사기 위해 안전한 마진(Margin of Safety)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 말은 투자자 자신이 평가한 가치보다 낮은 가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주식의 가치가 20달러인데 실제 거래되는 가격이 14달러라면 안전한 마진은 30%가 된다.


안전한 마진이 20% 이상이면 주식을 사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레이엄은 회사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재무비율을 사용했다.


재무비율은 재무제표에 나타난 수치로 회사의 재무상태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수익률은 매출 중 얼마나 수익을 냈는지를 알려준다.


자기자본수익률(ROE)은 자기자본과 수익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ROE는 회사경영진이 주주의 투자액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주가수익비율(PER)과 장부가치 대비 가격비율도 가치와 가격의 괴리를 판단하는데 유용하다.


PER란 주가를 1주당 순이익으로 나눈 것으로 PER가 낮을수록 주가가 저평가돼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업종별로 다르지만 보통 PER가 15배이면 적정한 수준으로 본다.


그레이엄은 저서 '현명한 투자자'에서 PER가 10배인 회사에 대한 분석을 예로 들었다.


그 회사는 해당 분기에 주당 1.58달러의 수익을 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재무제표의 각 주를 분석해 미심쩍은 대손금을 반영,이 회사의 수익을 주당 0.70달러로 다시 계산해냈다.


그래서 실제 PER는 22배가 됐다.


회사의 재무제표를 꼼꼼히 뜯어보지 않으면 잘못된 근거로 투자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레이엄은 가치 있는 회사를 찾기 위해 기업의 연차보고서도 철저히 활용했다.


그는 1926년 노던파이프라인이라는 회사의 연차보고서에서 이 회사가 주당 95달러의 가치를 지닌 채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던파이프라인은 수익을 제대로 내지 못해 투자자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회사였다.


당시 이 회사의 주가는 65달러였지만 그레이엄은 주식을 샀다.


그레이엄은 경영진을 찾아가 회사가 채권을 보유할 이유가 없으며 그 돈은 주주의 몫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그레이엄의 끈질긴 설득에 노던파이프라인은 채권을 팔아 주주들에게 주당 70달러를 지불했으며 그레이엄은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레이엄은 다양한 주식을 포트폴리오에 편입시키고 배당을 주는 주식에 투자했다.


그의 평균 주식보유 기간은 2년 정도였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그는 자기 자산의 25%를 손해보험회사인 GEICO에 투자했으며 그 주식을 무려 20년이나 보유했다.


GECIO는 배당에도 인색했다.


그러나 그는 이 주식을 성장주로 간주했으며 결국 72만달러를 투자해 20년 만에 10억달러에 가까운 수익금을 벌어들였다.


◆그의 생애


그레이엄은 189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이듬해인 1895년 가족들이 모두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가 아홉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어머니가 홀로 그레이엄을 포함한 세 명의 아들을 키웠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그의 어머니는 증권 브로커로부터 돈을 빌려 주식투자를 했다가 큰 손실을 봤다.


그래서 그레이엄은 고등학교 때부터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컬럼비아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그레이엄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학교로부터 수학과 영어 철학에 대해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현실이 그를 월가로 이끌었다.


그레이엄은 증권사 채권담당 직원으로 투자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19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인 연봉 60만달러를 받는 천재 펀드매니저가 됐다.


그는 1926년 투자회사를 창업했다.


적어도 1929년까지 그의 회사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은 가치투자의 원조인 그조차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기였다.


주가가 폭락하면서 그는 엄청난 재정적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엄은 펀드매니저로 활동하면서도 약 30년을 컬럼비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56년 은퇴한 뒤 캘리포니아로 이주,UCLA경영대학원 교수가 됐다.


1976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작가인 자넷 로는 "그가 투자업계에 미친 영향은 베이브 루스가 야구에 미친 영향과 같다"고 썼다.


김태완 한국경제신문 증권부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