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비평가 허버트 리드는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 세계'를 가리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이래 과학과 과학철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평했다.
근대 과학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근대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분석한 이 책은 과학철학 혹은 과학 사상사의 뛰어난 고전 중 하나다.
수학자에서 출발해 유기체 철학이라는 독창적인 세계관을 주창한 철학자로 변신한 화이트헤드는 난해한 저서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이 책은 대중 강연을 위해 쉽게 씌어졌기 때문에 부담이 적다.
한편으로는 근대 과학적 세계관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그리고 21세기를 대비한 미래의 철학으로 여겨지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한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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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서 함수관계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이미 16세기에 중요하게 대두됐다.
이에 따라 자연법칙을 수학의 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질서를 밝힐 수 있다는 생각도 지배적이 됐다.
이와 같은 수학의 진보가 없었다면 17세기 과학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자연을 관찰할 때 동원하는 상상력의 힘은 수학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갈릴레이,데카르트,호이겐스,뉴턴 등 여러 과학자들이 자연법칙을 수학의 식으로 나타냈다.
수학에 나타나는 추상적인 개념의 발달이 16~17세기 과학에 영향을 끼친 구체적인 예로 주기성이라는 것을 살펴보자.
우리는 주변에서 반복되는 현상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달이 반복해서 차고 기울며 일년의 사계절이 반복된다.
또한 회전하는 물체는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며 심장의 고동도 반복되고 호흡도 반복된다.
어디를 둘러보나 반복되는 것과 마주치게 된다.
이러한 반복이 없다면 지식이 성립되지 못한 것이다.
왜냐 하면 반복을 통하지 않고는 과거의 경험을 참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반복의 규칙성이 없다면 측정한다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정확성이라는 관념을 열어내는 데는 우리의 경험 중에서 반복이라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
주기성 이론은 16~17세기 과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케플러는 각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저마다 궤도를 그릴 때 타원궤도의 장반경과 회전주기를 관계짓는 법칙을 발견했다.
갈릴레이는 진자의 주기적인 진동을 관찰했다.
뉴턴은 소리를 공기 밀도의 성김(소)과 촘촘함(밀)이 반복되는 주기적인 파동이 공기를 통과할 때 만들어 내는 교란에 기인된 것으로 설명했다.
호이겐스는 빛을 주기적인 파동으로 설명했다.
메르센느는 바이올린 현의 진동주기를 현의 밀도,장력 및 길이와 연결시켰다.
이러한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7세기의 과학은 주기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다양한 구체적 현상에 적용시킴으로써 탄생했다.
하지만 그 전에 수학자들이 주기성에 관련된 여러 가지 추상적인 개념을 확고히 정립해 두지 않았더라면 이런 작용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삼각함수 이론은 직각삼각형의 세 각을 양변과 빗변의 길이의 비에 관련시키고자 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후 새로 발견된 함수해석학이라는 수학의 영향을 받아 삼각함수 이론은 보다 간단 명료하고 우상적인 주기함수 이론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삼각함수 이론은 하나의 완전한 추상적인 이론으로 정립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과학에 더욱 유용하게 됐다.
즉 삼각함수 이론을 이용하여 전혀 다르게 보이는 주기 현상의 집합들 밑에 깔린 유사성을 밝힐 수 있었고 동시에 각 집합이 지니는 특징을 분석하고 상호 연관시킬 수 있게 됐다.
수학이 극도로 추상화된 사고의 높은 경지에 이르면 이를수록 구체적인 자연현상을 분석하는 데 수학이 더욱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17세기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마치 그리스 시대의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의 꿈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17세기에 시작된 이러한 특성은 그 이후의 세기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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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와 뉴턴과 같은 근대과학 혁명기의 과학자들은 과학자로서 글을 썼을 뿐,사상가로서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들의 사상은 구체적인 연구와 단편적인 언급을 통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 세계'는 참으로 독보적이면서 귀중한 저서다.
이 책은 공개 강연을 위해 쓰여진 원고로 근대 과학이 어떻게 근대적 세계관을 형성해왔는지,그리고 그 문제는 무엇인지를 평이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원래 수학자였고 제자였던 버트란드 러셀과 함께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써서 수리논리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으로도 유명하지만,'과정과 실재''관념의 모험''이성의 기능' 등 일련의 저서를 통해 자신의 독창적인 유기체 철학을 세운 철학의 거인이기도 하다.
그의 유기체 철학이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근대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미래의 철학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두자.
◆자연의 언어는 수학
이 짧은 제시문에서 화이트헤드는 아주 고전적인 정식을 제시하고 있다.
"근대 과학은 자연을 수학적인 관계로,수학의 법칙으로 표현하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 생각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찍이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의 법칙을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로고스는 논리,말이라는 뜻도 있지만 수학적 비례를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했다.
이 단어가 라틴어에서 비율,이성을 나타내는 ratio로 바뀌었고 이 단어가 '이성적인,유리수의'라는 의미를 가진 rational의 어원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예전부터 사람들은 자연은 법칙적인 세계라고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우주 행성의 운행이 수적 비례에 따른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 법칙을 수학의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과학과 더불어서였다.
갈릴레이는 "자연은 기하학의 언어로 씌어졌다"고 말했고,뉴턴과 동시대인이었던 윌리엄 블레이크는 컴퍼스를 든 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화이트헤드는 추상적 개념의 발달을 통해서 이러한 발전이 가능했다고 본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것을 지우고 본다는 뜻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구체적인 계절을 지우고 나면 추상적인 '주기'만 남는다.
삼순이와 삼식이,두일이와 프란체스카,이런 이름들을 지우고 나면 '연인'이라는 관계만 남는다.
이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함수'다.
데카르트의 직교좌표 역시 구체적인 시공간을 모두 지운 채,원점과의 관계(가로와 세로축의 거리)만으로 위치를 표현하는 추상적 공간이었다.
근대 과학자들은 자연을 바라볼 때 뒤에 숨어있는 추상적인 관계와 법칙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의 수학화
그러나 그들이 발견하거나 만들어낸 수학적 법칙은 자연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과학이란 원래 현상의 법칙성을 설명하기 위한 근사적 공식을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법칙이란 자연을 설명하려는 시도이지,자연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수학적이다"라는 말보다는 근대 과학이 "자연을 수학화해서 이해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수학화란 결국 자연을 추상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로 보는 것이며,각 부분들을 쪼개어 분석하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보는 것이든,사회를 보는 것이든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강조하며 추상화의 경향을 비판한다.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추상화를 통해 기계론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전체적 연관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전체를 부분으로 쪼개는 환원론(reductionism)적 경향에 대항해 전일론(holism)의 회복을 부르짖은 미래적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화이트헤드가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해 비판한 대목을 읽어보자.
"(현대의 전문가들에게) 유용한 지식이란 전문 지식이며,이것은 이에 속하는 유용한 주제에 정통한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러한 상황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틀에 박힌 정신을 낳는다.
각 전문 분야는 진보하지만,이 진보는 자신만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전문화되는 것은 추상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틀은 폭넓은 영역을 정신에 제공하지 못하며,추상은 사전에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는 것을 배제한다.
(중략) 지식의 전문화가 야기하는 폐단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히 심각하다.
이성의 지도력은 약해지고 지도적 입장에 있는 지식인들은 균형을 상실하게 된다.
상황의 어느 일면만을 보고 좀처럼 양면을 보지 못한다.
요컨대 사회가 전문적인 여러 분야에서는 훌륭하게 기능하고 진보하지만,전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지니지 못한다.
세부적인 것에 편중된 진보는 통합의 기능이 미약한 데서 오는 갖가지 위험을 증대시킨다."
김원기 초암논술아카데미 선임연구원 closely@naver.com
[ 약력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 철학과 석사
△(현)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구술 강사
△<대중문화 속 과학읽기> <포스트모더니즘과 유대인 대학살의 부인> 등 다수 교양서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