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인 사고를 논할 때 마키아벨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그의 '군주론'은 덕과 윤리라는 고전적인 덕목으로부터 정치의 독립까지 포괄한 혁명적인 저술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로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으로 이어지는 과학 혁명이 있었고,그와 더불어 데카르트의 철학적 혁신이 있었다면,사회와 윤리를 보는 관점에서 근대 이전과 이후를 결정적으로 나누는 기점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근대 사회철학의 대표적인 사상을 사회계약론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사회계약론은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자연법의 원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과 비교하면 마키아벨리의 이론이 얼마나 정직하며 현실적인지를,그래서 얼마나 '현대적'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를 읽을 때 우리는 어떤 사상가들의 책을 읽을 때보다도 더 분명하게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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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상적인 견해보다 사물의 구체적인 진실을 따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현실적 존재로서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방식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이상(理想)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열중한 나머지 현실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멸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서 완벽한 선(善)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착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파멸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지위를 보전하고자 하는 군주는 좋지 않은 짓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언제 그것이 필요하고 언제 그것이 필요치 않은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악덕이 없이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는 그런 악덕의 오명(汚名)을 뒤집어쓰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군주는 두려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함께 누리기는 어려우므로,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사랑을 받기보다 두려움을 받는 편이 안전하다.
사람들이란 일반적으로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이고 위험을 피하기에 급급하며 이익을 탐낸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주가 은혜를 베푸는 동안은 전적으로 군주의 편이어서 자신의 피 재산 목숨과 자식까지도 바치겠다고 하는데,그것은 실제로는 그럴 필요성이 별로 없을 때 하는 말이다.
막상 그래야만 할 때가 닥치면 그들은 배반한다.
그래서 그들의 말만 믿고 다른 준비를 해놓지 않은 군주는 몰락하게 된다.
위대하고 고상한 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돈을 주고 얻은 우정은 매수한 것일 뿐 진정으로 확보한 것이 아니며,따라서 위기에 몰리면 군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인간은 두려움을 주는 사람보다 사랑을 주는 사람을 해칠 때 덜 망설인다.
사랑은 의무의 사슬로 묶여 있는 것인데,인간은 이기적이어서 자기 목적에 도움이 될 때는 언제든지 그 사슬을 끊어버린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심으로 유지되는데 그것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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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1469~1527)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이다.
동시대인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미켈란젤로(1475~1564),라파엘로(1483~1520) 등이 있다.
이들이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마치 비스마르크 이전의 독일과도 같이 여러 개의 공국으로 나뉘어 각각의 제후들이 지배하던 '분열 상태'였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1469년은 프랑스 샤를 8세가 이탈리아 정복을 감행한 해였다.
이탈리아는 그 뒤로도 지속적인 외침과 내분으로 혼란상태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일찍이 공직에 나갔으나 그리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난 뒤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공자와도 비슷하지만,제자들을 길러냄으로써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공자와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군주(제후)를 위한 조언을 하기 위해 역사연구와 전술연구 등에 몰두한다.
마키아벨리의 재능은 매우 뛰어났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풍자적 코미디인 '만드라고라'를 비롯해 여러 편의 희곡을 완성하기도 했다.
군주론은 그가 썼던 여러 편의 저술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하며 중요한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 자신은 이 책을 생전에 공표하지 않았다.
당시 교회측의 반발을 우려해서라고 추측되지만 어쨌거나 죽은 다음에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동안 금서로 취급됐다.
당시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지나치게 '솔직'했던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라
'군주론'은 도발적인 책이 아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처세술을 가리켜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충성심과 혼란으로 인해 고통받던 민중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을 무시하는 처사다.
마키아벨리는 감정을 앞세워 남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정치를 분석했을 뿐이다.
군주론은 군주국의 역사와 종류를 분석한 뒤 실제 사례들을 조목조목 들어가면서 군주의 덕목에 대한 실용적 처세술을 논했다.
"군주가 구축하는 요새와 그 비슷한 것들은 과연 유익한가"라는 제목은 아주 실용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운명은 인간사에서 어느 정도 힘을 가졌으며,또 운명의 힘에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는 제목을 접하면 이것이 단순한 책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왜 영지를 잃었는가"나 "이탈리아 해방을 위한 권유"라는 제목의 장은 당대 이탈리아의 현실과 그것을 변화시키려 했던 마키아벨리의 포부를 짐작하게 해준다.
대입 지문으로 출제된 적이 있는 이 글은 전체 26장으로 이뤄진 군주론에서 제17장(잔인함과 인자함에 대하여,그리고 사랑받는 것과 두려움을 주는 것 중 어느 편이 나은가)에서 발췌했다.
전체 글의 중간 부분에 있는 '군주의 덕목'을 말하는 부분인데,마키아벨리가 예로 들고 있는 인명과 사례는 우리들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것이어서 대부분 삭제하고 논지만 남겼다.
◆마키아벨리의 근대성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를 논했을 때 그것은 바람직함,덕,완전함 등의 덕목과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동양철학의 고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학이란 윤리학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전혀 그러한 구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상상적인 견해보다 구체적인 진실을 따르는 것이 낫다.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방식과 이상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다."
근대 철학을 가리켜 '신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한 철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을 전혀 거론하지 않을 때 인간의 지식은 어떻게 완성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근대 인식론의 출발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의 철학은 근대적이다.
정의의 명령자이자 그 자신이 정의인 신을 전혀 거론하지 않을 때 정치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마키아벨리는 감히 그것을 묻고 생각했으며 글로 남겼다.
그래서 군주는 "어떤 규범을 따라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가장 나은 결과를 나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마키아벨리는 윤리라는 것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인간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점은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썼을 때 묘사한 현실적 인간(르네상스의 현실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계몽사상과 차이가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는 두려움을 심어주되 민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법가와 잔혹한 독재정치가 동의어가 아니듯,마키아벨리의 현실적인 정치론과 권모술수의 정치술은 같은 것이 아니다.
비난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마키아벨리즘'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책을 현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마키아벨리적'인 우리들 자신이다.
<군주론>을 읽으며 독재자가 왜 실패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그들은 마키아벨리의 말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아니면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김원기 초암논술아카데미 선임연구원 closely@naver.com
[ 약력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 철학과 석사
△(현)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구술 강사
△<대중문화 속 과학읽기> <포스트모더니즘과 유대인 대학살의 부인> 등 다수 교양서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