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오일쇼크' 오나] 이러다가 전깃불도 못켜는 거 아냐?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안겨준 오일쇼크는 인류 역사상 2차례 발생했다.


1차 오일쇼크는 1973년10월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불거졌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곧바로 끝났다.


하지만 아랍 산유국을 중심으로 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그해 11월4일 원유생산량을 25% 감산한다고 발표했다.


아랍 산유국들은 전세계 석유 수입국가들을 '아랍 우호국가'와 ''이스라엘 우호국가'로 구분하고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국가들에 대해선 석유공급을 제한하거나 아예 금지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유대교 국가인 이스라엘에 패한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를 보복 조치의 강력한 무기로 삼은 것이다.


이로 인해 1973년 배럴당 2.5달러 선에서 유지되던 국제 유가가 이듬해 초에는 4.7배인 배럴당 11.7달러까지 치솟았다.


당시 한국은 이스라엘 우호국으로 분류됐다.


때문에 한국에 원유를 공급하던 걸프 칼텍스 유니언 등 3개 석유메이저는 공급량을 감축하겠다고 통보해왔다.


급속한 공업화로 원유소비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데다 1973년부터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을 시작한 한국에서 원유공급 차질은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들 석유 메이저들과 끈질긴 협상을 통해 원유 공급 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한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선 1차 오일쇼크의 영향을 덜 받았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오일달러를 겨냥,중동건설 시장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오일쇼크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1980년 터진 2차 오일쇼크는 1978년12월 OPEC의 기습적인 유가인상 결정으로 시작됐다.


이란이 국내 정치(이슬람 혁명)와 경제적 혼란을 이유로 원유생산량을 대폭 줄이고 수출을 중단한 것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1차 석유파동때 배럴당 10달러선을 조금 넘었던 유가는 불과 6년사이 20달러선을 돌파했으며,선물시장에서는 배럴당 40달러까지 치솟았다.


한국은 2차 오일쇼크로 인해 1차 쇼크 때보다 훨씬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2차 오일쇼크가 터지기 직전인 1977~1979년 평균 8.7%이던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오일쇼크 직후인 1980~1982년에는 3.9%로 낮아졌다.


1980년에는 정치불안으로 인한 소비침체와 맞물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2.1%로 급전직하했다.


80년대초 3년간 소비자물가는 연평균 38.9%나 급등했다.


무역수지 적자폭도 연 평균 40억2천만달러로 크게 확대됐다.


19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성장 정책으로 원유 의존도가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박준동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