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고전읽기]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上)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1637년의 저작 '방법서설'에서 그 전까지 학문을 지배해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과학을 자신의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으로 대체하는 것을 시도했다. '방법서설'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책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은 '방법서설'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간 이성과 학문적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적 믿음,수학에 기초한 방법론,비판적인 태도 등 근대적인 학문정신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카르트를 읽으면서 400여년 전의 사람이 쓴 책이 왜 여전히 우리 시대의 것인지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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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良識)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는 그 양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모든 다른 일에 대해 완전히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양식보다 더 많이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옳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사람들은 그 능력을 양식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이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은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균등하게 배분돼 있다고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는 의견의 엇갈림이 다양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생기거나 우리가 동일한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좋은 정신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칙적인 것은 정신을 잘 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심오한 영혼은 가장 큰 덕도,가장 큰 악도 범할 수 있다. 그런데 곧은 길만 따른다면 매우 천천히 걷는 사람들이라도 빨리는 달리지만 곧은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앞지를 수가 있다. (중략)


한 국가도 논리의 수많은 규칙과는 반대로 몇 개의 기본 법률만 가지고 이를 엄격히 준수하는 경우에 더욱 잘 통치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그런 법칙을 단 한 번이라도 어기지 않기 위해 튼튼하고 확고한 결심을 갖기로 하고 다음의 네 가지 방침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첫째로 내가 명증하게 참이라고 인식하지 아니하는 어떤 것도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조급한 판단이나 편견을 피해 나의 정신에 명석하고 판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결코 나의 판단 속에 포함시키지 않고 내가 의심할 수 없는 것만을 포함하겠다.


둘째로 내가 검토하는 각각의 어려움들을 가능한 한,그리고 더 잘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선에서 가급적 세분한다.


셋째로 나의 생각을 질서있게 인도하기 위해,즉 인식하기에 가장 단순하고 쉬운 대상들로부터 출발해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복잡한 것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자연대로는 피차 아무런 순서도 없는 것들 사이에도 질서를 부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아무 것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어떠한 경우라도 전체적인 열거와 일반적인 검열을 실시한다.


기하학자들이 가장 어려운 증명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매우 간단하고 쉬운 논증의 연쇄작용은 나로 하여금 인간의 인식 아래서 모여질 수 있는 모든 것은 같은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사람들이 참되지 못한 것을 진리라고 수락하기를 포기한다면,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아주 먼 진리는 없는 것이며 또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할 만큼 깊이 감추어진 진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략)


이러한 방법에서 나를 가장 만족시켜 주었던 것은 바로 그 방법을 통해 가능한 나의 능력에서 적어도 완전히 최선의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모든 면에 있어서 나의 이성을 사용한다고 확신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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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데카르트는 새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기초를 확립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굴절광학''기상학''기하학' 등 세 편의 과학적 논문을 출판하기로 마음먹는다. '방법서설'은 이 세 편의 논문에 대한 시론이었다.


이 글은 엄격하게 철학적이거나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전적인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에세이였다. 그가 '성찰'과 같은 본격적인 철학적 저작을 통해서 보여준 학문과 이성에 대한 견해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유용하고 효과적이었다.


발췌문은 그가 생각한 기본적인 학문 방법론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고전이라는 이름에서 기대할 만한 '위대한 생각'을 읽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상식적인 내용을 지루하게 서술해 놓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고전이란 이미 우리 문화와 사회의 토대가 돼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데카르트를 읽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위대해서라기보다는 데카르트적인 생각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우리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당시에 진리라고 받아들여진 것들이 얼마나 기초가 허약한지를 비판했고,확실한 기초 위에 진리와 학문의 토대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확고한 진리란 누구에게나 명증한 것이거나 적어도 누구나 올바른 방법만 사용하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의 앞부분에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올바른 것을 판단할 이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뒤 올바른 방법의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자신이 발견한 방법의 원칙을 소개하기 위해 여러 학문의 원칙들을 검토한 다음 그러한 원칙은 수학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방법론의 원칙을 확립한 뒤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제1원리'로 발견하는 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원리다. 연세대학교에서 이미 출제된 이 글의 뒷부분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그리고 19세기 소년감화원의 규칙을 수록해놓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그리고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한 부분을 모아놓음으로써 서구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원리가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위의 글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성의 규칙 혹은 방법론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목표를 얻을 수 있으며,그러한 이성의 규칙 혹은 방법론이란 수학적인 또는 기계적인 절차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데카르트만이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보다 약간 앞선 시대의 갈릴레이는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책"이라고 보았고 당시 물리학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생각이었다. 기본적으로 갈릴레이나 뉴튼의 새로운 물리학이란 수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물체의 속도나 천체의 움직임에서 수학적 관계를 찾으려 했던 이들보다 더 철저하게 멀리 나갔다. 그는 이러한 수학적 원리가 이성과 진리의 기초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훈련받은 수학적(기하학적) 사고방식을 일반적인 이성의 원리,문제 해결과 진리 발견의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발견할 수 없는 진리란 없다'


여기에는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성장으로 자부심을 갖게 된 근대인의 당당한 자신감이 드러나 있다. 데카르트는 '너무 멀거나''깊이 감춰져' 도달하거나 발견할 수 없는 진리란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학문과 진리에 대한 이러한 낙관적인 태도는 르네상스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데카르트의 시대에는 이미 분명한 것이 됐고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인간의 모든 신념과 낙관론의 기초를 무너뜨리기 전인 19세기에 가장 도도한 흐름을 보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단순한 몇 가지 이성의 원칙만으로도 모든 진리를 찾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데카르트의 신념은 소박한 것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로서는 신선하면서도 과감한 주장이었다. 동시대인들이 갖게 된 생각을 가장 먼저 분명하게 내세운 것이 데카르트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지만 말이다.


과학과 이성의 이름으로 빚어진 수많은 불합리함을 알게 된 지금에도 여전히 데카르트적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핵무기 환경오염 기계문명의 비인간성 등을 충분히 경험한 지금도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는 데카르트적인 믿음 자체가 붕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황우석 박사의 업적과 성공에 감탄한다면 데카르트가 이미 과학을 통해 인간이 불로불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환기해볼 필요가 있다. 아니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이,방학 때 공부 계획표를 열심히 짜는 학생들이라면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후예인 셈이다.


연세대학교의 논술 문제가 잘 보여주듯이 근대의 합리적 이성이란 그렇게 단순한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한 신뢰를 통해 그 장점과 단점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학생들에게 근대적 이성의 아버지 데카르트도 학생 시절에는 엄청나게 게을러서 늘 늦잠을 자기 일쑤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 약력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 철학과 석사


△(현)초암논술아카데미 논술.구술 강사


△<대중문화 속 과학읽기> <포스트모더니즘과 유대인 대학살의 부인> 등 다수 교양서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