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에누리' '구라'...일본말?
시인이자 재야 국어연구가인 우재욱씨('삐삐와 깜박이''양심과 이기심이 권투장갑을 끼면'의 저자)는 사석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밝힌 적이 있다.


"한번은 출판사에 글을 넘겼는데,1차 교정 본 것을 검토했더니 내가 '야코죽다'라고 쓴 부분을 모두 '기죽다'로 바꿔놓은 거예요.


출판사 담당자에게 따졌죠.


그가 하는 말이 '야코는 일본말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어 '순우리말'이라고 했더니 그제야 사전을 찾아보고 나서 다시 고치더군요."


우리가 쓰는 말 중에는 순우리말인 데도 평소에 잘 쓰지 않아 마치 외래말인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있다.


그 형태가 일본말과 비슷해 일본말인 줄 알고 애써 다른 말을 찾는 엉뚱한 일도 벌어진다.


'에누리'(값을 깎는 일)도 의외로 일본말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1만원짜리를 에누리해 5000원에 샀다"처럼 쓰이기도 하고,"그의 말에는 에누리가 좀 많다"에서처럼 실제보다 보태거나 줄이는 일을 나타낼 때도 쓰이는 우리 고유어이다.


"아줌마,여기 국수사리 하나 더요." "사리는 일본말이잖아?" 국수나 새끼,실 따위를 둥그렇게 감은 뭉치를 뜻하는 '사리'도 고유어이므로 쓰는 데 망설일 필요가 없다.


'모꼬지'도 우리가 살려 써야할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마돈나 지금은 밤도,모든 목거지에,다니노라….'


20세기 초 이상화가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발표한 초기 시 '나의 침실로'의 시작 부분이다.


이상화는 너무도 유명한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여기 나오는 '목거지'가 몇 년 전부터 일부에서 MT(Membership Training)를 대신하는 말로 쓰이는 '모꼬지'이다.


놀이나 잔치 따위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뜻한다.


요즘 초등학생 교실에서는 '모둠'이란 말을 쓰는데 둘 다 어원적으로 '모이다(會)'에서 온 말이다.


맛있는 '모듬회'를 먹으면서 이 말이 '모둠회'라고 해야 바르다는 것도 함께 알아두자.


인터넷 신조어가 넘쳐나는 요즘엔 다소 그 쓰임새가 줄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라'나 '따까리'라는 말을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구라'는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일 뿐 엄연히 표준말이면서 순우리말이다.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맡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따까리'도 마찬가지.


다만 속된 말이므로 가려 쓸 필요는 있다.


희미하여 확실하지 못한 것을 두고 '애매(曖昧)하다'라고 한다.


'모호(模糊)'도 같은 말이다.


각각 홀로 쓰이며 힘주어 말할 땐 '애매모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애매'는 일본식 한자어이니 '모호'만 써야 한다는 주장이 꽤 널리 퍼져 있는 듯하나 이 역시 근거 없이 왜곡된 주장이다.


다만 우리말에는 한자어 '애매하다'라는 말 외에 '애꿎다,억울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순우리말 '애매하다'가 있다.


가령 "애매한 법규가 애매한 사람 잡는다"고 했을 때 앞뒤에 쓰인 '애매한'은 서로 다른 단어라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광복 이후 일본말 찌꺼기 추방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많은 성과를 올린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는 원래부터 써오던 순우리말이거나 한자말임에도 불구하고 잘못 알려져 부당한 대우를 받는 말도 있다.


아름다운 우리말은 자꾸 써야지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이어간다.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