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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군사력·상업에 문화·종교까지 결합한…청해진 바다 영토 확대하며 신라 사회개혁 의식 높여

    장보고와 청해진 체제는 무장력과 해양력을 바탕으로 동아지중해의 운송업, 삼각중계무역, 보세가공업을 운영했고 문화교류와 이데올로기 통합도 주도했다. 자치권과 상업활동, 세금 혜택 등이 보장된 느슨한 경제특구에 해당할 수 있다. 장보고는 천민도 왕족이 될 수 있다는 사회 개혁의식을 확산시켰다.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에는 평화의 시대, 경제의 시대, 무역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라비아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 동로마까지 연결된 사막 실크로드와 초원 로드는 동아지중해 무역망과 긴밀해지는 중이었다. 국가들과 대상인들은, 무장력을 갖춘 해상 관리자가 해적들을 퇴치해 바다를 평정하고, 무역로를 보호해 주길 원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장보고는 고향인 완도를 해양요새 ‘청해진’으로 만들고 본국신라인들, 재당신라인들, 재일신라인들을 ‘범(汎)신라인’으로 네트워크화해 항로를 일원화시켰다. 국제무역과 국내산업을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인 청해진은 국제교통의 ‘인터체인지(IC)’가 되었고 신라와 당나라, 일본, 아라비아 상인들은 물론이고, 승려들과 사신들도 장보고 선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쌍방무역을 넘어 삼각 중계무역 … 문화상품까지 주도장보고는 무역시스템을 변화시켰고, 상업의 내용과 상품을 다양화하는데 일조했다. 당나라에 ‘대당매물사’라는 수입상인들과 교관선(무역선)을 파견해 당나라, 동남아시아, 아라비아의 고가품들을 수입했고, 신라의 산업제품들을 수출했다. 일본에는 수입상인(廻易使·회역사)을 파견하고, 직접 후꾸오까(福岡)시를 방문해서 사무역은 물론 공무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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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력 바탕으로 한·중·일 항로 독점한 장보고…범신라인 네트워크로 무역의 시대를 이끌었다

    국제관계의 혼란스러운 재편 속 한국은 어떻게 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문제는 사람과 정책이다. 우리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조상이 간 ‘길(道)’을 바라보면서 미래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지금, 과거 동아시아 세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신라의 장군이자 무역상인 장보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보고는 누구인가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에는 평화의 시대, 경제의 시대, 무역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라비아까지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 동로마까지 연결된 사막 실크로드와 초원 로드는 동아지중해 무역망과 긴밀해지는 중이었다. 장보고는 이 같은 국제정세 변화 속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아내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 천성과 특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거시적인 안목과 경륜을 갖춰 국제질서 변화와 신라의 내부상황을 간파하는 능력을 발휘했다.장보고는 790년경 섬(海島)에서 태어나 841년에 암살당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한 장보고는 짧고 냉소적으로 기술돼 있다.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 사람이다. 그들의 고향과 조상(父祖)은 알 수 없다.”는 내용과 함께 “청해진의 궁복은 왕이 자기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자 원망하면서 청해진에 머물면서 모반했다.”고 기록이 남아 있다.그런데 《신당서》와 그 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두목이 묘사한 장보고는 전혀 다르다. 장보고와 정년은 싸움을 잘 했고, 특히 장보고가 용맹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에서는 ‘장보고(張保皐)’를 보배롭고 고귀하다는 의미의 ‘장보고(張寶高)’라고 남기기도 했다. 천태종의 좌주였던 엔닌(圓仁)은 장보고에 편지를 보내 흠모하고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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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신라인들이 구축한 해안경제 벨트·동아시아 물류망, 경제특구·일대일로 등 중국 개방경제의 '모범'이었다

    8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동아지중해 세계는 본격적으로 평화의 시대, 상업의 시대, 무역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대에 당나라는 국제화와 개방을 추진해 신라인과 발해인 외에도 중앙아시아인, 페르시아인, 동남아시아인들이 수도인 장안(시안), 양저우, 광저우 등의 대도시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또한 무역을 중요시해서 오아시스 실크로드와 해양 실크로드를 활용한 동서무역이 활발했다. 본국 신라인들과 동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백제 유민 및 신라인으로 구성된 재당(在唐) 신라인, 일본에 사는 재일 신라인 등은 ‘범신라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라시아 물류망에 적극 참여했다. 신라와 일본을 당나라 중심의 유라시아 물류망 속에 편입시키는 일을 범신라인 상인들이 했다. 각 해역과 항로에 익숙한 범신라인들은 남해항로, 동해남부 항로까지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동아지중해 유통망을 확장하고 활성화시켰다. 신라인들의 뛰어난 조선술신라인들은 조선술도 뛰어났다. 752년 신라가 일본에 파견한 김태렴이 이끄는 사신단은 700명의 인원이 7척의 배로 갔다. 평균 1척당 100명이 승선한 셈이다. 839년의 기록에는 ‘신라선이 풍파에 강하다’고 했고, 840년의 기록을 보면 대재부가 신라배를 6척이나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상인이나 승려 등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신단조차도 신라배를 활용한 적이 있다. 이 무렵에 일본 승려들이 타고 온 신라배가 교토부 히에이산의 명덕원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쌍 돛대에 활대가 9개, 사각돛과 누각이 있고, 물레를 이용하여 닻을 조정했다. 일본의 견당선들은 4척 정도가 1개 선단을 이뤘는데, 1척당 약 100명에서 150명 남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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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에 자리잡은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들…뛰어난 항해술로 운하경제와 해양무역서 맹활약

    중국은 한때 빈국이었으나 1980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선택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해 미국과 갈등을 벌이는 중이다. 중국의 성공에 기여한 화상(華商)들과 중화 경제권은 8~9세기 동아지중해의 ‘범신라인 공동체’와 흡사했다. 또한 덩샤오핑이 추진한 경제특구 전략은 신라방, 파사방을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윤명철,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범신라인들의 구성'범신라인 공동체'는 본국 신라인들과 동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재당 신라인, 재일 신라인들의 네트워킹 시스템이다. 현재 ‘한민족 공동체’와 ‘한상 연합회’가 섞인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그중 핵심 역할을 담당한 집단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들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재당신라인들은 고구려·백제 유민과 신라인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수적으로 가장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이정기(李正己)일가가 다스린 제나라에 살다가 제가 멸망한 후 ‘신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백제계 유민들은 전라도 해안 일대에서 임시정부를 따라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충청도와 경기도 해안지방에서는 황해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해 산둥성과 장쑤성 해안에 도착한 후 고구려 유민들과 합세했다. 816년에는 농민들 170여명이 저장성 지역으로 건너왔다. 이 같은 ‘보트피플’들과 승려, 유학생, 심지어는 노예로 팔려온 신라인들은 함께 신라촌을 이루고 살았다. 일종의 ‘신라타운’인 셈이다. 그리고 점차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이라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운하경제와 해양무역에 참여한 재당신라인재당신라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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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계무역까지 했던 원조선은 동아지중해 무역 강국

     활발한 말 수출과 모피 가공업원조선은 축산업을 장려했고, 특히 말 수출을 했다. 말은 15세기까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였고, 고가의 무역 품목이었다. 한나라 무제가 장건을 우즈베키스탄(페르가나 지역)까지 파견한 목적은 흉노의 기마병을 대적할 말(한혈마)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기》에 따르면 바로 그 시기에 위만조선은 전쟁을 종식시킬 목적으로 태자에게 군량미와 함께 무려 5000필의 말을 한나라에 보내게 했다. 이런 목마산업은 고구려로 계승돼 중계무역까지 벌이게 했고, 발해 또한 유명한 말 수출국이었다.모피 가공업과 무역도 활발했다. 모피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몽골에 240여 년 동안 지배받았던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넘어 극동까지 온 제일 큰 이유는 모피의 획득과 모피세 때문이었다. 베링해는 값비싼 ‘해달’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만주는 서만주 건조지대를 제외하고는 숲과 강이 발달해 생태계가 풍부하고, 훗날 제작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확인되지만 호랑이, 표범, 곰, 여우, 담비 등의 동물과 약초, 어류가 풍부했다. 어피 생산도 활발했지만,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 담비가죽은 근대까지도 엄청나게 고가로 팔린 무역 상품이었다. 《관자》에는 원조선이 춘추 전국시대에 산둥반도의 제(齊)나라에 문피(표범가죽)를 수출했다는 내용이 있다. 해양 무역을 벌인 증거다. 북한사학은 기원전 2세기에 단궁, 돈피, 문피, 과하마 등과 반어피 등을 한나라에 수출했다고 주장한다(홍희유 《조선상업사, 고대·중세》). 산업·기술·무역·문화 발달한 강대국또 조개 채집과 무역도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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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 유구국 등 아시아 남방지역과 활발한 교류…당나라 거주 신라인들의 경유지 역할 했을 수도

    해양 소국 탐라(耽羅)는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탐라는 고구려와도 연관을 맺었다. 《위서(魏書)》에는 문자왕 때 북위에 파견된 사신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珂·진주라는 설)는 섭라(제주도)에서 생산됐는데, ‘가’는 백제가 점령해 못 보낸다”고 변명하는 내용이 있다. 또 제주의 삼성신화(三姓神話)를 수록한 《영주지(瀛洲志)》에는 시원신화를 소개하면서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솟았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실린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는 고씨가 고구려에서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주도와 고구려는 경제적인 교류는 물론 주민들 이동도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에 항복…801년 이후 국가 관련 기록 없어탐라는 신라와는 비교적 늦게 관계를 맺었다. 《영주지》에는 고을나의 15대 손인 고(高)씨 3형제가 신라에 입조해 왕에게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662년에 탐라국주가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신라와 교섭을 벌였지만, 801년을 끝으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장보고를 비롯해 당나라에 거주했던 ‘재당 신라인’들은 일본을 오고갈 때 제주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키나와와 교류해 주목탐라는 일본 열도와도 교섭이 활발했다. 《영주지》에 따르면 3성혈에서 나온 ‘고·양·부’ 3인과 결혼한 삼신녀는 일본으로 알려진 동해 벽랑국에서 왔다. 661년 5월에는 왕자인 아파기 등이 왜국에 공물을 바쳤고, 665년부터 693년까지 빈번하게 사신단을 파견했다. 또 저장성 해안을 출항한 4차 일본 견당선이 표류 끝에 일부

  • 역사 기타

    신라는 완도에 '청해진' 설치해 중국·일본과 무역했죠…'해상왕' 장보고의 반란으로 해체돼 바다와 멀어졌죠

    무역만이 아니었다. 신라인의 대외 진출도 활발했다. 814년 심한 흉작과 잇따른 내란으로 인해 상당수 신라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서일본 곳곳에 표착하는 신라인 수가 적지 않았다. 820년 원강(遠江)과 준하(駿河)에 정착한 신라인은 700명이나 됐다. 중국으로 건너간 신라인도 많았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당시 중국으로 이주해 각종 직업에 종사한 신라인에 관한 정보를 풍성히 전하고 있다.신라인의 대외 진출838년 엔닌이 일본을 출발할 때부터 그의 옆에는 신라인 출신 통역이 있었다. 중국에 표착한 엔닌 일행은 바닷길을 잘 아는 신라인 60명을 고용했다. 바다를 따라 북상하는 도중에 그들은 숯 운반선을 탄 신라 상인 10명을 만났다. 엔닌 일행이 도착해 머문 곳은 등주에 있는 구당신라소(句唐新羅所)였다. 등주는 오늘날의 산둥반도다. 거기엔 장보고가 세운 적산원(赤山院)이란 절이 있었다. 절에는 30여 명의 신라 승려가 있었으며, 연간 500석을 추수하는 농장이 딸려 있었다. 법회가 열리면 250명의 신라인이 참가했다.엔닌이 의도적으로 그의 행렬에서 이탈해 구법의 순례를 떠난 것은 순전히 적산원의 배려와 주선에 의해서였다. 그가 들른 곳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신라인의 자치촌이 있었으며, 신라원(新羅院) 또는 신라관(新羅館)이라는 신라인의 행객이 머무는 숙박 시설이 있었다. 당의 수도 장안에는 대략 7~8명의 신라 승려가 있었다. 엔닌이 만난 신라인 가운데는 상인 출신으로 항해 중 일본에 표류했다 돌아온 사람도 있고, 장기간 일본에 체류해 일본어에 능통한 사람도 있었다. 완십삼랑(阮十三郞)과 같이 이름이 일본식인 신라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