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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기존 세력의 저항과 사회체제 경직성 벽 막혀…북학파 이상과 정책제안, 부분적 개선에 그쳐

    만약 청나라, 일본, 러시아를 통해 서양의 평등사상과 독립 의지, 발전된 과학 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면 어땠을까? 필시 세계의 존재와 문화의 다양성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관념론을 벗어나 실용론을 추구했을 것이다. 또 지구와 우주의 인식을 통해 거시적인 세계관을 갖추고, 조선의 정체성도 더 자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익 박지원 안정복 유득공 등은 만주의 역사와 지리를 발견하고,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재인식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상과 정책제안은 부분적 개선은 가져왔지만, 그 또한 왕을 비롯한 주류의 이익이 반영된 결과가 컸다.북학파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첫째, 주류 집단의 성격과 이데올로기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세계관이 협소할 뿐만 아니라 역동성을 상실해 400년 가까이 진보와 혁신의 필요성에 눈감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을 독점하면서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신사상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했다.둘째, 신분제 사회체제의 경직성이다. 신분에 따른 착취와 예속의 구조가 심각해 자발적인 생산과 창조가 어려웠다. 산업과 상업 등이 미발달했고, 자발성을 망각한 백성은 의욕을 잃은 생산자들이었다. 이익이 정리했듯 지주와 농민, 양반과 상인, 출사자와 비출사자, 적자와 서얼 사이에 관직과 토지를 놓고 숙명적인 이익 충돌이 벌어지는 구조였다.셋째, 추진 집단의 한계와 능력 부족이다. 소외 집단이면서 서얼인 그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정치력과 경제력에 한계가 있었다.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심지어는 정약용도 고위관리나 대토지 소유자가 아니었다. 또한 가치관의 변화를 유도할 문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붕괴하던 조선에 등장한 사상운동, 북학 주류집단 반발과 사회체제 경직성에 부딪혀

    17세기 후반부터 두꺼운 벽틈으로 미풍이 불어오고, 메마른 땅에서는 샘물이 솟기 시작해 점차 강물로 변해갔다. 북학을 핵으로 삼은 실학이 조선 역사에 등장했다.북학은 소외됐던 이상주의자들이 주도해 적대감을 가졌던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해 부강한 조선, 잘사는 백성을 목표로 삼자는 사회개혁의 학풍이고 사상운동이었다.첫째, 그들이 추구한 목적과 제안한 정책은 ‘경세치용’ ‘이용후생’을 거쳐 ‘실사구시’로 단계적인 발전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인식론의 변화, 농사에서 상공업 중시 등 정책의 변동, 서학인 천주교의 수용 등을 놓고 노선을 달리했다. 그리고 기존 체제로부터 음양의 피해를 봤다.조선은 두 번의 대전쟁과 패배,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한 대참사, 양반 관료들의 탐학, 성리학자들의 무능으로 붕괴하는 중이었다. 또한 신분제 일부가 무너지고, 외국과의 비자발적 교섭, 포로들의 귀환, 통신사와 연행사들의 견문 등으로 쇄국과 성리학의 맹신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붕괴의 진행을 막아야 할 조선의 선택은 ‘체제의 강화’란 시대의 반동 또는 부분적인 양보를 통한 개선이었다. 주류들은 전자를 택해 요행을 바라며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소외된 지식인들은 보편적 인성과 성리학의 원론에 충실하면서 사회 개선의 인식과 학문을 자생적으로 만들어갔다.이익은 재야의 자생적인 사상가로서 성리학의 관념성을 배격하고, 현실 개선의 방책을 전방위로 전개한 경세치용학파이다. 뒤를 이은 홍대용은 ‘북학’을 표방하면서 본격적으로 청나라와 서양 문물의 이론과 기술, 지식을 수용해 실생활에 응용하고 도움 주는 연구를 했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