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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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영국 처칠이 독일함대 제압했던 힘은 '석유'
1911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상에서 가장 바빴던 사람은 아마도 윈스턴 처칠이었을 것이다. 그해 7월 독일제국 빌헬름 황제가 모로코의 아가디르항에 군함을 파견해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처칠은 게르만족과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각의 ‘경제 제일주의자’들을 이끌던 그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 주장하며 군비 확장파의 목소리를 제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독일 황제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해군 장관에 임명된 처칠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며 경제 제일주의자들을 납득시켜야 했다. 군비 강화에 주력하던 그는 기술적 사안 하나를 놓고 이번에는 군부(軍部)를 설득하는 데 진땀을 흘린다. 그것은 영국 해군 함정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는 문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 해전(海戰)은 석유와 석탄의 싸움영국 산업혁명의 동력은 석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습관과 신뢰는 경로의존성을 갖기 마련이다. 군부는 안정적 공급이 가능한 석탄 대신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페르시아 석유에 의존하겠다는 처칠의 주장에 반발했다. 사실 영국의 구축함과 잠수함 일부는 이미 석유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군의 중추인 주력 전함들은 여전히 석탄을 때고 있었다. 해전(海戰)의 핵심은 속력이다.당시 영국 전함들의 평균속도는 21노트(knot)였는데, 처칠의 목표는 이걸 25노트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독일 함대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러자면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갈아타야 했다. 게다가 석유는 순간적으로 속도를 빠르게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석탄 선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