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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범신라인들이 구축한 해안경제 벨트·동아시아 물류망, 경제특구·일대일로 등 중국 개방경제의 '모범'이었다

    8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동아지중해 세계는 본격적으로 평화의 시대, 상업의 시대, 무역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대에 당나라는 국제화와 개방을 추진해 신라인과 발해인 외에도 중앙아시아인, 페르시아인, 동남아시아인들이 수도인 장안(시안), 양저우, 광저우 등의 대도시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또한 무역을 중요시해서 오아시스 실크로드와 해양 실크로드를 활용한 동서무역이 활발했다. 본국 신라인들과 동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백제 유민 및 신라인으로 구성된 재당(在唐) 신라인, 일본에 사는 재일 신라인 등은 ‘범신라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라시아 물류망에 적극 참여했다. 신라와 일본을 당나라 중심의 유라시아 물류망 속에 편입시키는 일을 범신라인 상인들이 했다. 각 해역과 항로에 익숙한 범신라인들은 남해항로, 동해남부 항로까지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동아지중해 유통망을 확장하고 활성화시켰다. 신라인들의 뛰어난 조선술신라인들은 조선술도 뛰어났다. 752년 신라가 일본에 파견한 김태렴이 이끄는 사신단은 700명의 인원이 7척의 배로 갔다. 평균 1척당 100명이 승선한 셈이다. 839년의 기록에는 ‘신라선이 풍파에 강하다’고 했고, 840년의 기록을 보면 대재부가 신라배를 6척이나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상인이나 승려 등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신단조차도 신라배를 활용한 적이 있다. 이 무렵에 일본 승려들이 타고 온 신라배가 교토부 히에이산의 명덕원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쌍 돛대에 활대가 9개, 사각돛과 누각이 있고, 물레를 이용하여 닻을 조정했다. 일본의 견당선들은 4척 정도가 1개 선단을 이뤘는데, 1척당 약 100명에서 150명 남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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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에 자리잡은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들…뛰어난 항해술로 운하경제와 해양무역서 맹활약

    중국은 한때 빈국이었으나 1980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선택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해 미국과 갈등을 벌이는 중이다. 중국의 성공에 기여한 화상(華商)들과 중화 경제권은 8~9세기 동아지중해의 ‘범신라인 공동체’와 흡사했다. 또한 덩샤오핑이 추진한 경제특구 전략은 신라방, 파사방을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윤명철,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범신라인들의 구성'범신라인 공동체'는 본국 신라인들과 동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재당 신라인, 재일 신라인들의 네트워킹 시스템이다. 현재 ‘한민족 공동체’와 ‘한상 연합회’가 섞인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그중 핵심 역할을 담당한 집단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들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재당신라인들은 고구려·백제 유민과 신라인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수적으로 가장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이정기(李正己)일가가 다스린 제나라에 살다가 제가 멸망한 후 ‘신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백제계 유민들은 전라도 해안 일대에서 임시정부를 따라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충청도와 경기도 해안지방에서는 황해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해 산둥성과 장쑤성 해안에 도착한 후 고구려 유민들과 합세했다. 816년에는 농민들 170여명이 저장성 지역으로 건너왔다. 이 같은 ‘보트피플’들과 승려, 유학생, 심지어는 노예로 팔려온 신라인들은 함께 신라촌을 이루고 살았다. 일종의 ‘신라타운’인 셈이다. 그리고 점차 ‘재당신라인(在唐新羅人)’이라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운하경제와 해양무역에 참여한 재당신라인재당신라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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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통일 전쟁의 후유증…일본과 적대관계, 잦은 해적 약탈에도 신라·日 무역 꾸준히 증가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당나라의 편을 들었다. 661년부터 신라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8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676년에 불완전하지만 자체의 통일을 이룩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신라는 내부적으로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고, 재편된 신국제질서 속에서 자기 위상을 적립해야하는 과제가 있었다. 고구려가 부활한 북국인 발해와는 군사적인 긴장상태에 있었고, 새로 탄생한 일본국과는 충돌을 그치지 않았다.동아시아 세계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후 질서가 안정되고, 외교와 무역 문화를 주고받는 열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신라는 서해와 동중국, 남해를 이용할 수 있는 물류망의 허브였다. 당나라의 상품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토산품과 공산품들을 당나라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해야 했다. 일본에 시장을 개척하고, 수출망을 확장해야만 했다. 신라는 668년부터 779년까지 일본에 사신단을 47회나 파견했다. 일본의 신라정토론통일을 외세에 의존한 신라는 일본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감정적으로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초기부터 갈등관계가 있었지만, 결국 8세기 중반 무렵에는 국교가 단절됐다.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도 고조됐다.일본은 소위 ‘신라정토론’으로 알려진 정책을 추진했다. 내부적으로는 신라를 적으로 삼아 국가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왕권을 강화시켰다. 실세인 친백제계 후지와라(등원) 일가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 뿐 아니라 실제로 신라를 공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759년 9월에는 전국에 명을 내려 배 500척을 3년 안에 건조하도록 할당을 했다. 760년 4월에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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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무역의 시대 '물류 허브'였던 신라…서·중앙아시아 잇는 실크로드 출발·종착점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당나라 편을 들었다. 661년부터 신라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전쟁을 시작했다. 신라는 국력이나 전력을 비교하면 약세였지만 화랑정신 등으로 다져진 특유의 용기와 자주의식을 갖고, 복국전쟁을 벌이던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을 포섭해 민족전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토번(티베트)의 계속되는 공격과 아랍세력인 압바스 왕조의 중앙아시아 진출, 실크로드 지역과 투르크 등 북방 지역의 동요 등 유라시아 세계의 역학관계와 혼란을 겪는 당나라의 내부 사정을 활용했다. 그리고 당나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결국은 8년 전쟁에서 승리하며 676년에 불완전하지만 자체의 통일을 이룩했다.하지만 7세기 후반에 신라는 내부적으로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고, 재편된 신국제질서 속에서 자기 위상을 적립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고구려가 부활한 북국인 발해와는 군사적인 긴장 상태에 있었고, 새로 탄생한 일본국과는 충돌을 그치지 않았다. 내부에서도 토지의 황폐화, 인명의 손실, 군수산업 약화로 인한 산업구조의 혼란, 고구려·백제 유민 흡수와 처우 문제, 사회 갈등 등 전쟁과 통일의 후유증이 산적했다. 그 가운데 국부를 창출시키는 정책이 근본적이었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일이었다. 동아시아 세계의 안정과 무역의 시대동아시아 세계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후 질서가 안정되고, 국가들 간 충돌도 줄어들었다. 이제 정치와 군사가 주도하는 냉전질서에서 벗어나 외교와 무역, 문화를 주고받는 열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당나라는 중앙아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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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문화·종족 불완전한 신라의 삼국통일…원조선·고구려 계승 아쉬운 '반쪽 통합' 그쳐

    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떠 당나라와 각각 백제(평양 이남)와 고구려 영토를 갖기로 합의했다. 백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신라는 유민들을 활용해서 민족전쟁으로 전환시키면서 당군과 백제군(당나라가 파견한 부여융이 지휘하는 군대)을 격파하고, 사비성까지 탈환해 백제 영역을 완전히 차지했다. 671년 10월에는 당나라의 군수선 70여 척을 격파했고, 고구려 복국군과 연합해 672년에 백빙(수)산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673년에는 함선 100척을 서해에 배치해 초계활동을 벌였다. 675년에는 칠중성(적성면)에서 패했으나, 매초성(양주)전투에서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했다. 唐 내부 혼란·고구려 유민 활용신라의 강경책이 성공한 비결은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이 자국에 유리한 것을 파악하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고종이 병에 걸려 부인인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국이 어지러웠다. 제1 투르크 제국 멸망 후에도 투르크족의 반란은 계속됐고, 거란은 요서지방에서 위협적으로 성장 중이었다. 충돌을 반복하던 토번은 670년 18주를 빼앗았고, 677년에도 당나라를 패배시켰으며, 당나라의 종속국으로 만든 청해성과 감숙성 남부의 토욕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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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실한 준비로 백제와 고구려 무릎 꿇린 신라, 2단계로 당나라와 전쟁 이겨 삼국통일 이뤘다

    국가적 위기는 대부분 대혼란과 체제 붕괴로 이어진다. 고비를 넘겨 극복하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다.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이 그렇다. 신라는 6세기 초까지 약소국이었는데 약 150년 후인 668년 삼국을 통일했다. 거기까지는 1단계로 볼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리는 수준이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진정한 실현은 2단계인, 8년에 걸친 나당(羅唐)전쟁에서 승리하고 내부 안정을 완성했을 때다. 왕권 강화와 선진 문물 수용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우산국 복속(512년)을 시작으로 전략지구를 체계적으로 장악해 외교망을 확장하고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또 기존 체제와 신앙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인 끝에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진흥왕 33년에 사찰을 세우고, 전사한 사졸(士卒)들을 위로하는 ‘팔관연회’를 열어 사상의 통일을 유도했다. 통일사업의 주체인 자장, 의상 등은 유학 승려였고, 전통신앙과 불교가 조화된 화랑도는 종교 갈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김춘추의 활발한 외교활동신라의 통일정책 중 의미있는 것은 국제질서에 진입하고,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했다. 642년 의자왕에게 40여 개 성을 빼앗기고, 이어 대야성을 공격당해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달라는 제의를 거부해 옥에 갇혔다가 탈출했다. 고립무원 신세인 신라는 643년 당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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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년간 이어진 발해의 나라 되찾기 활동, 후발해국·정안국·을야국·대원국 등 세웠지만…

    10세기 들어와 동북아시아는 국가 간 질서재편으로 소용돌이쳤다. 당나라가 907년에 붕괴되면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대분열 시대가 시작됐고, 910년대에는 9개국이 난립한 상태였다. 토번(티베트)은 서남 지역의 영토를 대거 잠식했고, 몽골 초원에서는 세계사를 바꿀 ‘몽올’ 부족이 성장했으며, 840년에 멸망한 위구르 한(칸)국의 망명인들 또한 혼란을 일으켰다. 남쪽에서는 신라가 1000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중이었고, 신흥세력인 후백제와 고려가 긴박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국제질서의 변화를 간파한 야율아보기는 동몽골의 초원지대와 요서에서 거란족을 통일(916년)하고, 서남쪽으로 토욕혼 등을 공격한 후에 몽골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거란은 925년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주변국 상대로 적극적 외교관계 모색그렇다면 위기에 직면한 발해는 어떤 자구책을 강구했을까? 신흥국인 후량과 후당에 몇 번이나 왕자를 파견했다. 신라 등(‘新羅諸國’)에 구원을 요청하는(《거란국지》) 등 타국과 우호관계를 모색했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왕건의 선조인 호경(虎景)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사냥꾼으로서, 성골(聖骨) 장군으로 불렸는데, 이는 발해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왕건은 발해 유민을 환대했는데, 거란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방문한 호승(胡僧)을 통해 후진(後晉)의 고조에게 “발해는 우리와 혼인했습니다(渤海我婚姻也)”라고 했다.(《자치통감》)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발해 멸망 후그런데 의문이 든다. 야율아보기는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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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 공격에 한 달 못 버티고 전격적으로 무너진 발해…다양한 종족 구성에 잦은 임금 교체로 정치 혼란 거듭

    한 나라의 멸망은 하루아침에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오랜 기간 많은 신호를 보내지만 깨닫지 못한 채 당할 뿐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 등이 그랬다. ‘발해국’의 멸망을 화산 폭발 탓으로 돌리려는 사고는 수백 년 쌓인 관습적 오류일 따름이다. 전격적인 거란의 공격요나라의 황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발해국은 대대로 원수인데, 아직 보복을 완수하지 못했다”며 925년 윤 12월, 푸른 소(靑牛)와 흰 말(白馬)을 죽여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냈다. 예상을 깬 겨울작전을 펼쳐 부여성(지린성 농안)을 3일 만에 함락했다. 발해의 노상(老相)이 3만 명의 군대로 저항했으나 패했고, 요군은 수도인 홀한성(상경성, 헤이룽장성 닝안현)을 포위한 끝에 큰 전투 없이 4일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임금은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은 채 신하들과 함께 엎드려 빌었다. 228년의 역사는 허무하게 끝났다. 임금인 대인선과 왕비는 요나라에서 ‘오로고(烏魯古)’ ‘아리지(阿里只)’로 불렸는데, 끌려갈 때 탔던 말의 이름이다.발해는 신비한 나라다. 건국도 극적이었지만 붕괴도 전격적이었고, 멸망 원인과 시기도 불명확하다. 또 ‘발해’와 ‘발해인’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역사에 등장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으며,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고, 사방 5000리에 달한 영토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 발해는 왜 채 한 달도 못 버티고 멸망했을까? 역사가 후손에게 줄 유산은 ‘자랑’이 아니라 ‘교훈’이며, 남 탓이 아니라 제 탓을 하는 자세다. 한 달도 못 버틴 228년의 역사21세기와 마찬가지로 국제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