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박사의 인문학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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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운명의 꼭두각시인가 아니면 개척자인가…"그리스 비극 작품은 '운명'의 근원을 추적하죠"
인간은 운명의 꼭두각시인가?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자인가. 인간에게 운명이 있다면 그 운명은 신, 자연, 혹은 공동체와 같은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알게 모르게 만든 습관인가. 기원전 6세기 소아시아에서 활동한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습관은 인간에게 운명이다”는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을 환경 탓하는 인간에게 자신의 몸에 알게 모르게 쌓인 습관이 운명을 결정한다. 생각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며, 행동의 반복이 나의 환경이며, 환경이 굳어지면 운명이 되기 때문이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오이디푸스 왕》은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운명’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작품이다.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지난 2500년 동안 관객과 독자의 눈과 귀, 그리고 상상력을 확장시켜 왔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이 비극 작품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을 발견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육체적이며 심리적인 성장의 주춧돌은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한다.19세기 유럽인들은 산업혁명을 통해 물질의 풍요를 얻은 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신적인 틀인 인간 심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소포클레스 비극 공연들이 1880~1890년대 파리와 빈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유다. 프로이트는 이 공연을 인상 깊게 감상한 한 관객이었다. 그는 1899년 출간한《꿈의 해석》에서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행위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 깊이 내재된 인간 욕망의 발현이라고 주장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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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아테네인들의 창조·지적 모험의 상징이죠…자기의 운명 알지 못해도 용기와 지혜로 헤쳐나가죠"
전쟁과 역병에 시달린 아테네인들이 원형 극장에 앉았다. 그들은 이 끝이 보이지 않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에서 그들을 건져줄 영웅이 무대 위에 나타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무대에 등장한 영웅은, 실망스럽게도 모든 것을 당장 해결해 주는 ‘임시응변(臨時應變)의 신’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아니었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새로운 형태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소개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소포클레스는 그를 아테네 정신의 상징으로 부각시킨다.용기오이디푸스는 언행일치(言行一致)의 화신이다. 단지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는 신속하고 강력하게 일을 추진한다. 그는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꿈꾸는 아테네 정신이다. 페리클레스가 펠레폰네소스 전쟁 전사자들을 위한 장례연설에서 아테네의 특징을 말한다. “아테네는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려는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말한 바를 반드시 실천한다. 그는 테베를 엄습한 역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동원시켜 진실을 밝혀낸다. 테베는 완전 무장한 보병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정진하며 도시를 마비시킨 오염의 원인을 추적한다.오이디푸스는 용감하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황금기가 그리스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의 정점인 이유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유 때문이 아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절망 가운데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와 그 지혜의 빛을 밝히는 용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뻔뻔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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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각자의 절제된 문화적 심성이 아테네 문화의 바탕…인간의 거친 본성은 질서와 조화 교육으로 길들여졌죠"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이렇게 시작한다. “까마득한 옛 카드모스로부터 새롭게 양육된 내 자녀들이여!” 오이디푸스가 테베 궁전 중앙에 놓인 제단에 모여 있는 사제들에게 건넨 말이다. 소포클레스는 다른 위대한 작가들이 그랬듯이, 첫구절에 비극 전체의 주제를 숨겨놨다. 오이디푸스는 테베 왕으로 위엄 있는 풍채를 지녔지만 치명적으로 다리를 절뚝거렸다. ‘아들이 자신을 살해하고 왕이 될 것’ 이라는 델피 신탁을 받은 테베 왕 라이오스가 아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마자 그의 두 발을 실로 꽁꽁 묶어 야산에 버렸기 때문이다.유로파소포클레스가 ‘테베’라는 이름 대신 ‘카드모스’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카드모스라는 이름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지중해를 건너 페니키아(오늘날 레바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그리스 문명의 기원에 대한 실타래가 풀리기 때문이다. 페니키아의 항구도시 티레(Tyre)의 왕 아게노르(Agenor)에게는 아름다운 딸 유로파(Europa)가 있었다. 그녀는 지중해가 보이는 티레의 해변에서 꽃을 따고 있었다. 유로파가 작은 꽃다발을 만드는 동안, 그녀 앞에 보석과 같이 반짝이는 뿔이 달린 하얀 황소가 갑자기 나타났다. 이 눈부신 황소는 유로파에게 다가와 그녀가 주는 풀을 받아먹으며 따라다녔다. 유로파는 이 황소 뿔에 화환을 걸어주고 그만 이 매력적인 황소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황소가 급변해 달리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지중해 바다로 돌진했다. 유로파는 너무 무서운 나머지 황소 등에서 내리지 못했다. 황소는 유로파를 등에 태우고 지중해를 헤엄쳐 건너 크레타 섬에 도착했다.황소는 다름 아닌 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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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성적이면서 비이성적인 양면성 지녀…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통해 이중성 파헤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에 관한 가장 탁월한 작품이다. 기원전 429년, 아테네 시민 1만7000여 명이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디오니소스 엘류쎄레우스(Dionysus Eleuthereus·디오니소스 해방자)’란 이름의 원형 극장에 앉았다.아테네에는 디오니시아(Dionysia)라는 종교의례가 있었다. 디오니시아는 원래 새로운 포도주 재배를 기념하는 농경축제였다. 아테네가 디오니소스 엘류쎄레우스 축제를 수용하면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학적이며 예술적인 장르를 더했다. 바로 서양문명의 모체인 그리스 비극경연과 공연이다.아테네 역병《오이디푸스 왕》의 배경을 이해하는 핵심은 ‘아테네 역병’이다. 오이디푸스는 ‘델피의 신탁’대로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역병을 창궐시킨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살해했다. 하지만 역병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 작품은 주인공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역병을 치유하기 위해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오이디푸스는 주인공으로서 자기 운명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상상할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바로 자신과 경쟁하는 자다.《오이디푸스 왕》이 상연되기 2년 전인 기원전 431년,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레폰네소스 동맹이 전쟁을 벌였다. 민주정을 신봉하는 아테네와 소수가 권력을 쥐는 과두정을 신봉하는 스파르타와의 체제 전쟁이었다. 기원전 430년 아테네의 승리가 눈앞에 왔지만, 중세시대 흑사병과 같은 규모의 전염병이 아테네를 강타했다. 아테네에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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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는 서사시와 비극으로 대중을 교육시켜…이야기 전달 방식의 비극은 기원전 5세기에 등장했죠
인간은 오감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을 ‘깨닫는다’라고 표현한다. ‘깨달음’이란 자신도 모르게 옹고집처럼 감싸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깨는 활동이다. 내가 스스로 의도적이고 정기적으로 깨침을 수련하지 않는다면 나는 점점 더 ‘자기’라는 수렁에 빠져 나도 모르게 이기적이며 무식한 인간으로 변할 것이다.이야기인간은 특히 눈을 통한 보기와 귀를 통한 듣기로 배운다. 눈을 통해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장면을 경험할 때 배운다. 동서고금의 고전이나 경전들은 주위에서 언제나 우리의 눈을 기다린다. 우리의 눈은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 중독과 충성을 요구하는 게임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유혹의 특징은 끝과 만족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수백 수천 년 동안 우주에서 가장 혹독한 심판자인 시간이란 괴물의 검증을 받은 고전과 경전은 소중한 것을 선물한다. 이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깨달음의 수단으로 여기려는 사람들에겐 중독이 아니라 만족을 선사한다. 만족은 나의 충성을 애타게 요구하지 않지만 나의 의식을 확장해 취미를 선물한다. 고상한 취미를 지닌 자가 문명인이며 문화인이다.인류는 아마도 기원전 3만2000년께부터 다른 동물들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취미를 가졌다. 이 취미가 인간을 유인원과 구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다. 인류의 조상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태곳적 천지가 요동치면서 만들어진 지하 동굴로 내려가 자신들의 오감을 자극해 오래된 자신을 깨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의례(儀禮)를 거행했다. 그들 중 가장 용맹한 사냥꾼이 사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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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한 조각으로 현대인의 고독 표현한 자코메티…스마트폰 중독은 소외감 달래려는 몸짓일 수도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는 자신의 예술, 특히 조각 작품들로 19세기 근대사회가 20세기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유럽 한 복판에서 세계 1,2차 대전을 경험하면서 유럽 지식인들이 주도한 다양한 철학적인 시도들을 조각 작품이라는 가시적인 물질에 담아 대담하면서도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그의 관심은 시간이 인간의 시선을 왜곡하는 환영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그는 1940년대 후반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실제 장소에서 재현하는 방법을 두 가지 사상을 통해 발견하였다. ‘현상학’과 ‘실존주의 철학’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자의식’, ‘타인’, ‘허무’와 같은 철학적인 담론을 현대인들의 우울, 소외, 고독으로 표현하였다.‘외로움’현대인들은 외롭다. 손안의 핸드폰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우리의 관심을 유발할 만한 뉴스로 우리의 눈과 귀를 엄습한다. 우리는 왼손으로 핸드폰을 잘 볼 수 있도록 눈 가까이 올리고, 오른 손가락으로 그 매력적인 뉴스에 탐닉하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스크롤을 내린다. 그러면 우리는 한 순간에 그 화면 속으로 들어가 한 참 동안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러나 나는 외롭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나의 모습을 찾지 못할 때, 그리고 그것을 향해 지금 이 순간을 직시하고 장악하지 못할 때, 나는 외롭다. ‘외롭다’는 감정은 누군가의 존재를 갈망하지만, 그것이 나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생긴다. 핸드폰은 현대인의 빈 공간에 들어와 외로움을 달래주는 노예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안주인 노릇을 한다. 현대인들은 핸드폰의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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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원형 극장에 모인 2만명의 시민들…비극 작품을 보며 ‘숙고하는 인간’이 됐죠
대부분 국가들에서 왕정이 유일한 정치제도로 당연하게 수용됐을 때, 고대 그리스의 몇몇 정치가들과 시인들은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실험했다. 그들은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았다. 그들은 ‘공공교육’을 통해 자신이 지닌 자만과 욕심과 같이 아테네 공동체를 저해하는 해악들을 시민들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공동체 교육을 시작했다. 그 교육이 바로 ‘그리스 비극 공연’이다.‘정치적 동물’인류는 기원전 5000년께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에 살면서 자신의 생존력을 높였다. 그 안에 ‘개인의 삶’은 없었다. 개인은 날 때부터 자신의 신분이 정해져 있으며, 그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분이 요구하는 노동을 수행할 뿐이었다. 고대 사회는 왕을 중심으로 그의 일가친척들로 구성된 극소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대다수 시민들은 이들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들로, 자신들의 소출 대부분을 세금으로 귀족에게 바쳤다. 만일 할당된 수확량이나 세금을 상납하지 못하면 이들은 바로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고대 그리스 도시는 이주민들에 의해 서서히 형성된 도시들이다. 특히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레반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많았다. 그리스는 전통적인 가족, 친족, 부족을 초월해 같은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 그들은 유사시 외부의 적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평상시에는 서로 간 평화를 유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기본 단위를 ‘폴리스(polis)’ 즉 ‘도시’라고 불렀다. 아테네를 중심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