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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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진왜란으로 최대 10만명 안팎의 백성이 포로가 돼…마카오·인도·이탈리아·포르투갈 등지로 팔려나가
정권과 나라는 붕괴해도 괜찮다. 이민족, 다른 국가에 지배받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백성은 죽어서는 안 된다. 백성이 살아야 새 세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임진왜란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일본은 전쟁 결과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정권이 교체됐다. 명나라는 파병 목적을 이룬 대신 멸망이 앞당겨졌다. 만주의 여진족은 어부지리를 얻어 청 제국을 건설했다.침략을 받아 전장이던 조선은 승전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의병장들과 백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끌려간 포로를 내버렸다. 교토 시내의 ‘미미쓰카(耳塚)’라는 크지 않은 무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베어온 조선인의 귀 5만 명분이 묻혀 있다고 한다. 포로는 적게는 2만~3만, 많게는 10만 명이 넘고, 그 가운데 7500명 정도만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국에 귀환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포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고, 책임져야 할 조선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전쟁은 고도의 정치행위, 경제행위며 또한 문화행위다. 그 때문에 사람의 약탈이 있었고, 노예무역이 병행됐다. 일본군은 정치적인 영토 외에 자원과 문화재 약탈, 포로 획득을 목적으로 군대 체재까지 개편했다. 그 결과 학자, 의원, 도공 등의 기술자와 농민을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 적선에 실린 채로 대한해협을 건너 적지에 내팽개쳐진 조선 포로들의 운명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첫째, 대부분은 귀환을 체념한 상태로 정착해 일본인으로 변신했다. 노비를 비롯한 천민은 물론이고,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홍호현 이성현 등의 양반도 정착해 상급 무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 무렵 일본의 여러 곳, 특히 규슈에는 조선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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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군 파죽지세에 한양서 임금 탈출하며 '아비규환'…핍박받던 농민·노비 등 의병으로 궐기 전국서 유격전
의병(義兵) 의승(義僧) 의기(義妓) 의곡(義穀). 이런 선조들을 생각하면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생기가 돈다. 우리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지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은 비상시국이었고, 정부와 군대의 무능과 부재 현상을 알리는 안타까운 증거들이기도 하다. 의병들의 활동과 전적1592년 4월 13일 17시경 ‘임진왜란’ 또는 ‘임진조국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상륙 후 두 번의 전투를 마치고 북상했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배수진을 격파한 뒤에는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군했다. 조선의 군대는 제 역할을 못했고, 임금이 황급히 탈출한 서울은 아비규환이 됐다. 동요한 백성들은 공포에 떠는 존망의 기로에서 이순신의 옥포해전 승리 소식을 접했다. 이와 함께 곽재우가 경남 의령에서 재산을 털고 노비들을 포함해 의병을 일으킨 소식을 들었다. 역사에서 의병의 존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그는 ‘홍의장군’을 칭하면서 1000여 명의 군사로 낙동강 전투 등 숱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고경명은 전라도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동원했으며, 남원 지역의 안영(安瑛), 나주의 김천일(金天鎰) 등의 의병과 합심해 호남을 방어했다.조헌은 충북 옥천에서 일어나 승군 500명과 합동 작전으로 청주성을 수복했으나, 금산에서 관군의 불참으로 불리한 전투를 벌이다가 700명 전원이 전사했다. 함경도 북쪽에서는 정문부가 적군에 투항한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소위 북관대첩을 이뤘다. 이 밖에 젊은 김덕룡 형제를 비롯해 합천에서 정인홍, 고령에서 김면, 손인갑, 권응수 등이 있었다. 1차 진주성 대첩에 참여한 최경회, 심대승, 임계성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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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전쟁 초기 조선 국정수행·국방시스템·공동체의식 심각…일본군 전략·전술 혼란 겪을때 군대 정비하고 반격 시작
정부는 백성과 유생들을 동원해 해안 일대에 성을 구축했다. 그런데 이 정책은 선비들뿐만 아니라 백성의 불만을 낳아 추진하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전쟁 직전 상황에서는 평화를 앞세우는 온건파와 전쟁을 우려하는 강경파 간 갈등이 벌어지고, 권력투쟁으로 비화한다. 보통 불안과 희생을 피하려는 대중이 지지하는 온건파가 승리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강경파가 상황을 수습하는 데 적극적이고, 영웅 대접을 잠시 받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온건파가 강경파를 강제로 몰아낸다. 임진왜란 때도 이런 현상이 비일비재했고, 이후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다.셋째, 지배계급인 양반의 체질과 성리학의 사상적 한계가 작용했다. 양반은 기본적으로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천시해 국방 등의 민족 모순에 둔감했고, ‘사대’란 미명하에 명나라에 의존했다. 조선 특유의 성리학적 세계관은 양반의 이런 특권과 인식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또한 군사력을 보유한 무반의 성장을 두려워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했다. 건국 초기를 지나면서 문반이 국방에 직접 관여하는 일이 빈번해졌다.넷째, 백성의 불만이 커지고, 민심이 이반됐다. 중종 이후가 되면서 양반사회의 모순은 심각해졌다. 신분제도가 심해지면서 고착화됐고, 사대 사화를 겪은 뒤에는 동서로 갈라져 성리학을 내걸고 권력 쟁탈전에 몰두했다. 명종 때의 ‘임꺽정의 난’, 심지어는 전쟁 도중 발생한 ‘이몽학의 난’ 등에서 나타나듯 조선의 정체는 물론 국체까지 부정하는 세력이 곳곳에서 성장했다. 임진왜란 전세의 변화 양상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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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0년간 600회 가량 왜구의 침략 이어져…고려, 대마도 정벌에 나서지만 결국 멸망
통일국가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왜구의 침략은 큰 역할을 했다. 몽골과 원나라에 시달린 고려는 말기 40여 년간 왜구에게 무려 591회에 달하는 침략을 받았고 결국 멸망했다. 왜구의 침략은 이후 조선 시대에도 이어지다 ‘임진왜란’이란 정규군의 공격으로 대체됐다.왜구는 중국 해안과 연해주 일대까지 약탈했지만, 주로 고려에 집중됐다. 왜구의 끝없는 침략과 고려의 대응왜구들은 공민왕 20년 동안에만 100여 회 넘게 침략했으며, 우왕 때는 14년 동안에 378회나 쳐들어왔다. 1350년~1392년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591회나 침략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왜노들의 침략으로 나라는 이미 섬의 물고기·소금·목축의 이익을 잃었고, 또 곡식이 나는 기름진 들판을 잃었다”고 토로했다. 또 연해의 수천리 지역에는 인가에서 연기가 끊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정부는 1377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려는 논의까지 했다.고려는 뒤늦게 수세적인 태도를 버렸다. 처음에는 공격 대신 회유책을 사용했다. 공민왕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고, 대마도 만호에게 쌀 1000석을 주고 귀화를 원하는 왜구에게 남해안의 일부 지역을 거주지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도 왜구는 1374년 4월에 전선 350척을 동원해 합포(마산)로 진입했다. 왜구의 해적선은 대선은 300여 명, 중선은 100명에서 200여 명, 소선은 40~80명 정도가 승선이 가능했다. 이에 비춰 400~500척씩 선단을 구성했으니 마치 전면전 같은 양상이었다. 이때 벌어진 해전에서 고려는 40척이 손실되고, 5000명이 전사하며 패배로 끝났다.고려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이유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현상 때문이었다. 왜구들의 거점은 주로 대마도 이끼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