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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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 멸망이후 10년 끈 나·당 전쟁 이겼지만 대륙 잃은 한민족, 동아지중해 조정역할 약화
660년 당과 신라 연합군은 수륙양면군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 공략을 시도했다.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지만 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남부에서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동맹국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 간 공방전이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계속됐다. 663년 8월 나당 연합군과 백·왜 동맹군 사이에서 백강해전이 벌어졌다. 탐라의 수군도 참가한 치열한 전투였지만, 백·왜 동맹군은 참패를 당했다. 백제 유민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탈출했다.왜국은 나당 수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664년 해안가의 임시정청을 20여㎞ 내륙인 다자이후(太宰府)로 옮겼다. 이어 가네다성, 오노성, 기이성을 필두로 대마도, 규슈, 세토 내해를 거쳐 나라 지역까지 전략적 요충지마다 해양방어체제를 갖췄다. 모두 도호?쇼(答春初) 등 망명한 백제 달솔(백제의 16관등 중 제2위 품관)들이 주도한 백제식 산성이다. 그리고 당과 화친 교섭을 시도했다. 700년 역사와 자유의지를 남긴 채 사라진 고구려고구려는 백·왜 동맹군과 협동작전을 시도했으며, 666년을 비롯해 전쟁 중에도 여러 번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왜군은 고구려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외교활동이 활발했다는 증거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시 외곽의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에서 발견됐다. 강국(사마르칸트) 왕에게 온 외교사절 가운데 두 명이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고구려인이었다. 국제관계로 봤을 때 튀르크인이나 소그드인 상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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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제·왜 동맹군과 고구려, 신라와 연합한 당과 전쟁. 동아시아 질서 재편전쟁…70년 소용돌이 휘말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에 가정은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가정(What if)’이 없다면 역사는 박제물일 뿐,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라가 주도한 이른바 삼국통일은 불완전했지만 의미가 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후 전개된 역사를 살펴볼 때 고구려가 민족통일을 했다면 더 긍정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백강과 탄현 방어 못한 백제의 멸망고구려에 대패한 당태종은 648년에 죽고, ‘고구려 멸망’이라는 숙명적인 중국의 과제는 고종이 이어받아 659년까지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 660년 음력 7월 초,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대와 1900여 척의 함선(삼국유사)이 산동반도의 성산항을 출항했다. 서해를 횡단한 수군은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서 대기하던 신라 함대 100척과 합류한 뒤 백제의 경기만과 당진·홍성·군산 등 해안에 상륙했다. 주력군은 금강하구 전투를 끝내고 수륙양면군으로 수도 사비성 공략을 시도했다. 이 무렵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한 계백 장군은 나당 상륙군과 협공하려는 김유신의 5만 군대를 저지하다가 황산벌에서 산화했다. 백강과 탄현 방어를 간언한 성충과 흥수라는 전문가를 배척한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다.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왜국은 정세 판단의 미숙과 해전 능력 부족 때문에 파병이 더뎠다. 일본 천황(이하 역사서 명칭에 따름)이 661년 2월 규슈 북부에 도착해 임시관청을 설치하다 죽고, 뒤이어 아들 덴치(훗날 천황)가 8월에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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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양만춘의 지도력과 고구려인의 자유의지, 고립무원 상태의 안시성 '승리의 기적' 이끌어냈다
수를 대체한 당나라는 종주권 회복, 중화중심의 체제 완결이라는 중국적인 숙명도 계승했다. 대운하를 이용해 남북을 하나의 상권과 경제권으로 발전시켰다. 수도인 장안에는 페르시아인,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망을 확장했고, 남쪽에서는 인도, 아라비아까지 해양 실크로드가 활성화됐다. 유라시아 동쪽의 모든 나라와 종족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당나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고·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는 대당(對唐)정책을 놓고 요하전선 중심의 적극적인 대결을 주장하는 연개소문 세력과 해양 방어, 수성전을 선호하는 영류왕 세력으로 나뉘어 권력쟁탈전을 벌였다. 당나라의 총체적인 전력을 분산시키는 외교군사전략을 입체적으로 추진해야 했지만 다 실패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남부에서 백제, 신라를 외교·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당과의 연결고리를 끊는 전략이었다.이렇게 광범위한 전선이 형성된 가운데 벌어진 고·당 전쟁은 고·수 전쟁을 계승해 동아시아 종주권을 장악하고, 북방의 유목민족을 포위하는 대응전선을 구축하는 ‘제2차 동아시아 국제대전’이었다. 당나라는 선공을 하면서 해륙 양면작전을 개시했다. 645년 4월 요동성은 주몽사당에 승리를 빌면서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바람을 이용한 화공에 버티지 못하고 15일 만에 함락됐다. 당 태종은 남쪽으로 이동해 백암성에서 항복을 받았고, 안시성을 공격했다. 90일간의 안시성 공방안시성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90일 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당나라군은 사정거리 1000m의 기계식 활인 교차노(絞車弩), 이동식 투석기인 포차, 근거리 중형무기인 박간 등으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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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운동서 패한 유민들 대마도에 방어기지 구축
한반도에서 대마도에 가장 먼저 진출한 세력은 김해에 기반을 둔 구야한국 등 가야연맹들이다. 17세기에 편찬된 《대주신사지(對州神社志)》에는 옛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시다루의 해변에 큰 항아리가 흘러 왔는데,… ‘나는 가라로부터 왔으니 가라국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했다. 항아리를 뒷산에 안치했더니, 만조 때는 물이 찼고, 간조 때는 물이 빠졌다….” 이는 가야인들의 항해 과정과 연관이 깊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만의 안쪽인 이 마을에서는 가야계인 스에키 토기의 파편이 많이 발견됐다. 신라 건국 초기부터 대마도 왜인의 침공 잦아대마도는 신라와도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건국한 초기부터 침입한 왜인들의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주로 남풍이 부는 4~5월경에 침입한 이들 가운데 대마도의 왜인들이 많았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를 출항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대마도에는 신공황후와 연관된 전설과 물건들을 숭배하는 신사(神社)들이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408년 왜병들이 대마도에 군대와 무기, 식량 등 군수물자를 쌓아놓고 침공하려 하자 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다.나는 1982년 겨울 밤, 사고마을의 덴신다쿠쓰다마 신사에서 벌어지는 ‘오이리마세’라는 의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천도(天道)신앙’이라는 고대 신앙을 남긴 이곳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죄인이 신당에 들어가면 감히 잡지 못한다(罪人 走入神堂 卽亦不敢追捕)’라고 기록했다. 마한에 있던 소도신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윤명철 《일본기행》, 1989년) 애증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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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 유구국 등 아시아 남방지역과 활발한 교류…당나라 거주 신라인들의 경유지 역할 했을 수도
해양 소국 탐라(耽羅)는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탐라는 고구려와도 연관을 맺었다. 《위서(魏書)》에는 문자왕 때 북위에 파견된 사신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珂·진주라는 설)는 섭라(제주도)에서 생산됐는데, ‘가’는 백제가 점령해 못 보낸다”고 변명하는 내용이 있다. 또 제주의 삼성신화(三姓神話)를 수록한 《영주지(瀛洲志)》에는 시원신화를 소개하면서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솟았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실린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는 고씨가 고구려에서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주도와 고구려는 경제적인 교류는 물론 주민들 이동도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에 항복…801년 이후 국가 관련 기록 없어탐라는 신라와는 비교적 늦게 관계를 맺었다. 《영주지》에는 고을나의 15대 손인 고(高)씨 3형제가 신라에 입조해 왕에게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662년에 탐라국주가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신라와 교섭을 벌였지만, 801년을 끝으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장보고를 비롯해 당나라에 거주했던 ‘재당 신라인’들은 일본을 오고갈 때 제주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키나와와 교류해 주목탐라는 일본 열도와도 교섭이 활발했다. 《영주지》에 따르면 3성혈에서 나온 ‘고·양·부’ 3인과 결혼한 삼신녀는 일본으로 알려진 동해 벽랑국에서 왔다. 661년 5월에는 왕자인 아파기 등이 왜국에 공물을 바쳤고, 665년부터 693년까지 빈번하게 사신단을 파견했다. 또 저장성 해안을 출항한 4차 일본 견당선이 표류 끝에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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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카라반 교역은 고위험·고수익 벤처사업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는 두 개의 거대한 진나라가 있었다. 진시황이 통일한 중국의 진나라와 중국인들이 대진국으로 불렀던 로마제국이다. 대진국은 ‘서쪽의 커다란 진나라’를 가리켰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와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는 서로 상대방이 뛰어난 문물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사막, 산맥, 협곡, 강, 초원 등 건널 수 없는 지리적 장벽과 호전적인 유목 민족들이 가로막고 있었다.중앙아시아의 방대한 자연 장애물을 넘어 1만㎞ 이상을 걸어서 그 길을 오간 사람들이 바로 카라반이다. 카라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낙타다. 낙타는 등에 혹이 하나인 더운 사막지대의 단봉낙타와 혹이 둘인 아시아 초원지대의 쌍봉낙타가 있다. 단봉낙타는 안장과 같은 하우다를 얹어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었고, 쌍봉낙타는 짐 싣는 데 주로 이용됐다. 낙타 한 마리가 100~200㎏의 짐을 싣고 하루에 50~60㎞를 갔다.낙타가 가축화된 것은 BC 2500년께다. 인간이 사막지대로 진출하면서 낙타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낙타는 온순하고 수명이 길어 30~40년은 산다. 긴 눈썹과 코 근육으로 눈과 코를 막아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딜 수 있다. 또 물과 먹이가 없어도 혹에 저장된 지방을 분해해 오래 버틸 수 있다. 사막에 최적화된 낙타는 카라반에게 컨테이너 트럭과도 같았다. 그러나 낙타로 운반할 수 있는 물품은 한정됐다. 낙타 100마리에 짐을 가득 실어도 비잔티움시대의 배 한 척이 실을 수 있는 짐의 10분의 1도 안 됐다. 카라반의 영화도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열린 이후에는 자연히 사라졌다. 근대에 들어서자 교역로 곳곳이 두절돼 잊힌 길이 됐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